꽃밭에서

by 마정열

지난주에 소개했던 동요 '과꽃'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노래가 하나 있다. 1953년 발표된 어효선 작사, 권길상 작곡의 '꽃밭에서'라는 동요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 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 보며 살자 그랬죠

날 보고 꽃 같이 살자 그랬죠


6·25 전쟁이 휴전된 직후의 작품으로, 집을 떠난 꽃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생각하는 어린이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아빠는 전쟁터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나 보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애절하게 들린다.


동요에서는 꽃을 보면 아빠 생각이 난다고 했는데, 나는 비 내리는 날이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의 직업은 여러 가지였다. 부산에서는 외삼촌과 함께 화장품 장사를 하였다고 들었다. 화장품은 외삼촌이 만들고 아버지는 그것을 이곳저곳 다니며 팔았다고 한다. 외삼촌이 공장을 서울로 옮기고 우리 식구도 서울로 이사를 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화장품을 만들던 외삼촌의 공장은 몇 년 동안을 힘겹게 버티다 부도로 결국 문을 닫았다. 그 이후 아버지의 일터는 거리였다. 아버지는 계절마다 직업을 바꾸었다. 칼갈이, 우산장사, 건축현장의 잡역부.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산 장사였다.

궂은비 며칠째 질척거리는 홍제동 유진상가 처마 밑에서 아버지는 부러진 우산살을 요술처럼 붙여냈다. 가로등 없는 칠흑의 언덕길을 온몸으로 비를 안으며 비의 장막을 헤치고 돌아와 젖은 돈을 헤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도 부러진 우산살 잇지 못해 내리는 비 앞에서 황망히 서 있을 때면 아버지 생각이 종종 나곤 한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어느새 빗물이 되어 나를 흥건히 적시곤 하였다.


아버지의 삶은 한 그루의 나무 같았다. 거칠고 굳은 손마디마다 세월이 박혀 있었고, 굽은 어깨 위에는 가족의 생계가 얹혀 있었다.

아버지는 어둡고 깊은 땅속에 있는 꽃의 뿌리였다. 아버지의 고된 삶은 가족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한 뿌리였다. 우리는 뿌리의 양분을 먹고 자란 꽃이었고, 미약하나마 세상의 바람 속에 향기를 날렸다.


아버지가 꽃으로 환생했으면 좋겠다. 아니, 내가 알지 못해도 이미 꽃으로 환생했을지도 모른다. 돌밭이나 모래밭에서도 꽃을 피우는 채송화로, 패랭이꽃으로, 아니면 어디서든 뿌리내리고 밟혀도 끝내 꽃을 피우는 민들레로 환생했을 것이다. 아니 이 세상 모든 꽃이 아버지다. 자식에게 꽃이 아닌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고운 빛은 아버지의 미소이고, 고운 향기는 아버지의 숨결이다.




똑같은 제목의 노래가 있다. 정훈희의 '꽃빝에서'이다.

1979년 가수 정훈희는 제20회 '칠레가요제'에 출전하여 가요 '꽃밭에서'를 스페인어로 번안한 <Un Día Hermoso Como Hoy, 오늘처럼 아름다운 날>을 불러 최우수 가수상을 수상했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엔 이렇게 좋은 날엔
그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송이


이종택 작사, 이봉조 작곡으로 정훈희가 노래한 가요 '꽃밭에서'의 가사는 세종 26년 진사로 출사하여 세조 12년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최한경(崔漢卿)의 저서 <반중일기>(泮中日記)>에 실린 '화원(花園)' 이란 시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이 '화원(花園'은 최한경이 왕년 성균관 유생 시절 지었다는 시로, 어린 시절부터 결혼 사대로 양측 부친끼리 혼삿말이 오고 가기도 했던 여인을 생각하며 쓴 것이라고 한다.


坐中花園 瞻彼夭葉 (좌중화원 첨피요엽)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兮兮美色 云何來矣 (혜혜미색 운하래의) 몹시도 고운 빛, 어디에서 왔을까
灼灼其花 何彼艶矣 (작작기화 하피염의) 울긋불긋한 꽃이여 어떻게 그리도 농염할까
斯于吉日 吉日于斯 (사우길일 길일우사) 이렇게 좋은 날, 좋은 날인 이때
君子之來 云何之樂 (군자지래 운하지락)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臥彼東山 望其天 (와피동산 망기천) 동산에 누워 하늘을 보네
明兮靑兮 云何來矣 (명혜청혜 운하래의) 밝디 푸른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維靑盈昊 何彼藍矣 (유청영호 하피람의) 푸른 창공이여 어떻게 그렇게 풀어놓은 쪽빛일까
吉日于斯 吉日于斯 (길일우사 길일우사)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美人之歸 云何之喜 (미인지귀 운하지희) 고운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기쁠까


꽃을 보면 고운 님 생각도 나고, 아버지 생각도 나는가 보다.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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