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이 사라진 자리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by 마정열

2024년 10월 11일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보니 와우! 작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단다.

너무나 행복한 소식이다. 격하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다.


오래전 교직에 몸담고 있을 때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그때 한 줄의 감상문을 남겼다.


겨울방학에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다.


그 후에 '채식주의자'를 읽고 조금 긴 감상문을 썼다. 이 아침에 새삼 생각났다. 기쁜 마음으로 그때의 글을 찾아 읽었다.

불꽃이 사라진 자리 -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Ⅰ.

그리 짧지 않은 시간, 책 속의 활자가 전하는 의미와 머릿속의 이미지와의 충돌로 고통스러웠다. 책을 덮었다 다시 펴기를 몇 번. 영혜의 아픔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지 않았고, 몽고반점을 향한 ‘그’의 욕망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술적 열정? 나에게 없는 그 무엇에 내가 어찌 공감할 수 있을까?

다시 숨을 고르고 활자를 응시한다. 아주 조심스럽게 인혜와 영혜의 유년 시절을 그려 본다. 소녀들이 겪었을 숨 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조금씩 느껴진다. 영혜의 아픔과 고통으로 산산이 찢긴 인혜의 삶이 천천히 가슴을 헤집고 들어온다.

정신병원을 떠난 영혜는 어디로 갔을까?

소설의 마지막 문장 뒤로 곧바로 영혜의 장례식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영정 앞으로 한줄기 향연이 피어오른다. 마치 천상으로 오르는 영혼 같다고 인혜는 생각한다. 다음 생에는 정말 나무가 되어 환생하라고 영혜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나무가 살아가기에 그리 쉬운 세상은 아닌 것 같다. 나무에 가해지는 숱한 폭력.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나무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존재들.


그래도, 그래도... 영혜는 나무를 소망하겠지. 나무는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으니까.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고 최후에는 모든 음식물을 거부했다. 육식을 거부하는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녀가 행한 세계에 대한 폭력에 대한 사죄였으며,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의 세상에서 자신을 지킬 유일한 구원이었다. 영혜는 폭력적 세상에 대해 온몸으로 거부를 하였다. 그 거부는 또 다른 폭력을 낳았고, 거기에 그녀는 자신을 소멸시키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인혜가 아버지를 돌아본다. 그는 분향소 벽면에 기대어 초점 없는 눈으로 영혜의 영정 사진을 보고 있다.

아버지는 알고 계실까, 자식들을 자신의 자장(磁場) 속에 가두는 것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공포였다는 것을. 인혜는 그 공포를 견디고 살았지만, 영혜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다 결국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라졌다.


“먹어라. 애비 말 듣고 먹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다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p.48)


‘영혜를 위해서라고요? 혹시 아버지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니었나요? 아니, 느끼시지도 못하겠지요. 아버지는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이 우리의 사회였지요. 나도 영혜가 죽기 전까지는 몰랐으니까요. 그 숨 막히는 사회에서 자신을 지킨 영혜가 한편으로 부럽습니다.’


인혜는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이 말을 무거운 침묵으로 꾹꾹 눌렀다.


아버지의 얼굴 위로 두 명의 사내의 얼굴이 겹쳐짐을 인혜는 느꼈다. 영혜와 인혜의 전 남편들. 아버지처럼 폭력과 욕망의 세계에 적응하도록 진화된 존재들이라는 생각에 인혜는 몸서리가 쳐진다.


영혜의 전 남편. 이렇게 말해도 될까, 지극히 평균적인 한국의 남성. 아내의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는 아내의 아픔보다 세상의 시선이 더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니 망가진 시계나 가전제품을 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태도로 아내를 버린 남자.


인혜의 전 남편. 예술적 열정으로 포장된 욕망을 위해 자신을 밀고 나갈 데까지 밀고가 금기의 선까지 넘어버린 남자. 예술이 금기를 향한 도전이라지만 그것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사회에서 소멸된 남자.


한 남자는 사회에서 버티기 위해 가족을 버렸고, 한 남자는 사회적 금기를 넘어섬으로써 가족에게 버림을 당했다. 돌려 생각해 보면 두 사람 모두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희생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인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영혜는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저항을 했고 소멸을 택했다.


나는? 처절하게라도 살아야 했던 나는?


그녀는 계속 살아갔다.....등뒤로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았으며,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p.169)


인혜는 다시 한번 영혜의 영정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저기 저 자리에 내 사진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삶이 굴욕이라도 그것이 이 땅에서 태어난 여자의 운명이기에.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 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뜻밖의 고통을 느꼈다. 살아야 할 시간이 다시 기한 없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p.197)


영혜는 나무가 되어 불꽃으로써 자신을 태우고 떠났고, 나무의 재는 세찬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남자들은 말할 것이다.


“보아라, 나무는 불꽃이 될 수 없다. 결국 제 몸을 사르고 말 것이다.”


그래도 한 번쯤은 불꽃이 되고 싶다. 온갖 폭력의 세계에 대한 분노로, 그리고 저항으로.



Ⅱ.

이 소설은 육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길 꿈꾸는, 영혜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의 삶과 그녀를 둘러싼 사회적 공기(空氣)를 다룬다. 영혜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층적이다. ‘채식주의자’는 남편을 화자로 내세워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와 그녀를 고립시키는 주변인의 모습을 다루고, ‘몽고반점’은 그(영혜의 형부)의 시선으로 예술적 성취를 위해 금기마저 넘어서려는 그의 욕망과 동물적 본성을 벗어던지려는 그녀의 모습을, ‘나무 불꽃’은 인혜(영혜의 언니)의 목소리를 통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으나 벗어날 수 없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의식과 나무가 되어가는 영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을 아래와 같이 바꾸고자 한다.


제1부 관성과 각성

영혜는 ‘피가 흐르는 생육을 먹는 꿈’을 꾸게 되고 그 이후로 채식주의자가 된다. 그녀는 과거에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물었던 개를 오토바이에 매달아 죽여, 그 고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은 경험이 있었다. 그게 아마 알게 모르게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가 꿈에서 발현된 것이다.


육식의 은유는 다층적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폭력을 의미할 수도 있고, 폭력과 규율로 무장된 가부장 사회이자 현대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영혜는 이것을 거부하고자 한다.


영혜의 꾸었던 꿈은 각성이다. 영혜는 이 각성을 바탕으로 실천과 저항으로 나아간다. 각성과 실천은 필연적으로 세계로부터의 공격과 고립을 초래한다. 하지만 영혜의 실존적 저항은 멈추지 않고 결국 소멸을 택한다. 그 방법은 나무가 되는 것이다. 나무는 그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존재가 갈구하는 평화와 해방의 세계를 함의한다.


‘나’(영혜의 남편)는 세속적 세계에 적응된 적당히 기회주의적이고 속물적인 사람이다. 그에게 세계에 대한 한 인식을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세계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의 터전일 뿐인 것이다.


그에게 삶은 관성(慣性)이다. 기족도 관성적 삶의 도구일 뿐이다. 그 관성을 깨트리는 어떤 것도 그는 견디지 못한다. 심지어 그것이 가족일지라도.


소설은 진지하게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진정으로 퇴행적 진화를 거듭하는 것은 무엇인가? 각성인가, 관성인가?


제2부 욕망과 해방

아내로부터 처제(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는 온몸에다 꽃을 그린 남녀가 하나가 되는 세계. 그 순수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다는 예술적 열정에 사로잡힌다.


욕망은 예술적 열정으로 포장되어 있다. 욕망은 사회적 금기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예술은 금기를 욕망한다. 예술은 금기와의 투쟁이다. 하지만 금기는 사회공동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다. 이 금기의 선을 넘으면 그 사람이 가야 할 곳은 감옥 아니면 병원이다.


영혜는 식물이 되고 싶다. 꽃이 피고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 되고 싶다.

영혜는 동물적 본성으로부터 벗어남을 욕망한다. 그것은 해방이다. 동물적 본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 지점에서 욕망과 해방은 동의어가 되고, 그것은 곧 사회적 실존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는 금기에 도전하는 욕망으로 인해 사회적 실존을 상실했고, 영혜는 해방을 통해 사회적 실존을 버렸다.


제3부 현실과 초월

초월을 꿈꾸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던가? 영혜는 초월을 꿈꾸었고, 그것을 실천했다. 인혜는 그럴 수 없다. 현실을 벗어나기에는 사회적 관계망이 너무 촘촘하다. 소멸해 가는 영혜를 보고 겨우 버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이 자신을 괴롭힌다.

지금까지의 삶의 과정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하지 않았다면’을 수없이 반복한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기에 고통스럽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삶. 그녀는 지상의 삶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꿈만 같다.


....어쩌면 꿈인지 몰라......꿈 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p.221)


현실의 삶이 꿈이라면 꿈을 깬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인혜는 지상의 삶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현실적 삶의 방식을 깨고 새로운 삶으로 태어난다는 것일까?


소설은 질문을 던지고 나는 그 질문에 선뜻 답을 못한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p.221)


이 세계는 나무와 같은 존재를 때우는 불꽃일까, 아니면 나무라도 찬란한 초록빛 불꽃을 내며 자유와 해방의 몸짓으로 비상해야 하는 것일까?


책을 덮는 순간까지 이어지는 질문에 내 마음속의 불꽃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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