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와 닭장떡국

by 마정열

나는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다. 밀가루의 쫀득하고 미끈한 식감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언제부터 밀가루 음식을 좋아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의식의 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음식에 대한 기억은 밀가루 음식이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다녔던 시장에서 후루룩 거리며 먹던 국수의 맛은 지금도 입 안에서 맴돌고 있고, 입학식, 졸업식 등의 행사가 있으면 항상 기다렸고, 그 맛은 나의 기대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짜장면은 지금도 내가 즐겨 찾는 음식이다. 심지어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음식은 라면이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홍제동 달동네의 유년 시절, 우리는 수제비를 자주 해 먹었다. 엄마는 펄펄 끓는 물에 반죽한 밀가루를 조각조각 떼어 넣었다. 나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밀가루의 구수한 냄새에 취하여 수제비가 빨리 익기를 기다렸다. 잘 익은 수제비는 별 양념이 되어 있지 않아도 늘 나를 만족시켰다.


간혹 외할머니가 집에 들르곤 했다. 외할머니는 나를 붙들고 안쓰러운 눈길로

“오늘도 수제비 먹었니?”

하고 물었다. 그러면 나는

“어, 할머니. 맛있었어.”

라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할머니는 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에고, 불쌍해서 어쩐다냐.”

하며 애잔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할머니가 왜 나를 불쌍하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지만 우리 집이 부유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다. 철이 들고 나서 나는 비로소 알았다. 수제비는 엄마가 자식들의 끼니를 거르지 않게 하기 위한 눈물겨운 선택이었음을. 밀가루는 가난의 시대를 함께 건너온 삶의 동반자였음을.


아버지는 일용 노동자였다. 계절에 따라 직업이 바뀌었다. 겨울의 주된 직업은 칼갈이였고, 여름에는 우산 수선일을 하였다. 아버지 혼자 힘으로 가정의 지탱이 어려웠는지 자식들이 웬만큼 자라자 엄마도 일을 나가셨다. 엄마의 일터는 한강변의 채소밭이었다. 해가 떨어져 어두운 골목을 걸어오는 엄마의 몸에서는 흙냄새가 났다. 몸의 흙먼지를 털어내고 엄마는 홀로 부엌에서 늦은 식사를 했다. 쪼그려 앉아 식사하던 엄마의 뒷모습은 항상 물기에 젖어 있었다.


누나 둘이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서 집은 경제적으로 조금의 숨통이 터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수제비를 만들지 않았다. 나는 그때 비로소 엄마가 밀가루 음식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안 돼야. 냄새도 싫고.”

누나가 라면을 끓여 내오자 엄마는 상을 물리며 말했다.


나는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유년 시절 내가 입고 먹은 것의 상당 부분이 엄마의 몫이었다. 철이 없어 행복한 시절이었지만,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젊은 시절, 나는 한때 실업의 나날을 보낸 적이 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호기롭게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사업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몇 해만에 사업을 접고 다시 직장을 구하러 다녀야 했다. 이력서 제출과 면접으로 온종일 서울 시내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두세 군데 회사를 들르느라고 점심때가 훨씬 지난 시간에 허기진 배를 채우러 음식점에 들어갔다. 메뉴판에서 눈에 띄는 대로 식사를 주문했다. 수제비였다. 조금 후 김을 뭉글뭉글 피우며 푸짐한 수제비가 내 앞에 차려졌다. 국물을 휘저었다. 숟가락 위에 두툼한 밀가루 덩이 하나가 자리를 잡았다. 그것을 입으로 넣으려는 순간 밀가루 덩이가 내 시야에 선명히 들어왔다. 잠시 숟가락을 내려 그것을 찬찬히 보았다. 영락없는 엄마의 거친 손이었다. 수제비의 더운 김이 내 눈을 흐리었다. 아궁이 옆에서 반죽을 뜯어 넣던 엄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위로 포대기에 감싼 아이를 어르는 젊은 아내의 모습이 겹쳤다. 수제비에 담긴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날 처음으로 수제비는 퍽퍽하게 내 목을 메이게 했고, 텅 빈 식당 구석에서 엄마의 거친 손을 오물오물 씹으며 당신의 살을 뜯어먹고 살아온 나를 원망하였다.


엄마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말년에 뇌졸중과 치매로 고생을 하시다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요양병원으로 모셔 드리던 날, 병원 앞 음식점에서 점심을 했다. 나는 젓가락질을 제대로 못 하는 엄마의 밥숟가락 위에 고등어자반을 얹어 주었다.

“맛있구나.”

서너 개 남은 이로 오물거리며 엄마가 말했다.

“떡국이 먹고 싶구나. 니 할머니 떡국이 참 맛있었는데.”

식사를 하던 중 엄마가 말했다. 처음으로 엄마가 무엇을 먹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엄마가 말하는 떡국은 닭장 떡국임을 알았다. 엄마도 유년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남도의 후미진 초가 부엌, 엄마 곁에 쪼그리고 앉아 떡국이 익기를 기다리는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진 세월을 살아 종착역이 여기인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며왔다.


엄마는 새해 첫날이면 닭장떡국을 했다. 나는 떡국은 으레 이렇게 먹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집의 새로운 가족이 되는 사람들, 이를테면 매형이며, 아내는 처음 접한 닭장떡국에 적이 당황하였다. 그들에게 가래떡과 닭의 조합은 생소한 것이었고, 그 조합이 어떤 맛을 자아낼지 떡국을 입에 넣을 때 조금은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먹은 뒤의 반응은 한결같이 맛있다고 하였다.


엄마의 첫 번째 면회 날, 나는 그 전날부터 아내에게 성화를 부렸다.

“여보, 닭장떡국 한번 만들어 봐.”

“한 번도 안 해 본 걸 어떻게 해.”

말은 이렇게 했어도 아내는 인터넷을 뒤져가며 열심히 닭장떡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맛은 엄마의 닭장떡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와 아내는 그것을 정성스레 포장하여 요양병원을 찾았다. 아내는 엄마의 옆에서 닭고기의 살을 발라 엄마의 숟가락에 올려 주었다.

“맛있구나.”

엄마는 맛있게 먹었다. 나는 그 음식이 지상에서 엄마에게 해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음식인 것 같아 차마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병실을 나왔다. 후미진 복도의 의자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때문에 긴 시간을 앉아 있었다.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1년을 머물다 무거운 육신을 지상에 내려놓고 가벼이 승천하셨다. 나는 요즘도 수제비를 즐겨 먹는다. 그러나 이제는 수제비를 먹을 때 엄마의 고단한 삶을 추억하지 않는다. 엄마의 일생이 남들이 보기에는 누추한 삶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지상에 떨어뜨려 놓고 온전하게 지키고 키워준 고결한 삶이다.


수제비의 더운 김이 얼굴을 덮으면 마치 엄마의 따뜻한 온기가 나를 안아주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리고 이제 아내도 닭장떡국을 맛나게 만들어낸다. 그런 날이면 우리 네 식구는 식탁에 둘러앉아 수저의 놀림이 분주해진다. 그 모습을 엄마가 엷은 미소를 띠고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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