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by 마정열

겨울나무 아래에 섰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바람.

나무도 아픈가 보다.

가지가 힘겨운 신음소리를 낸다.


지나간 것은 흔적을 남긴다. 겨울바람은 지나온 계절의 냄새를 품고 있다. 바람에 떠는 나뭇가지 소리에서 나무에 새겨진 세월의 냄새가 후드득 떨어진다.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듯한 나무지만 지나온 봄과 여름과 가을의 흔적을 품고 있다. 잎이 나고 꽃이 핀 봄과 여름의 화려한 기억은 잎눈과 꽃눈 속에 새겨 놓았다. 아직 떨구지 못한 마른 열매 속에 풍요로운 가을의 기억도 새겨져 있다.


헐벗고 마른 몸이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 봄과 여름, 그리고 풍요로운 가을의 기억은 나무를 다시 살려 놓을 것이다.


겨울나무 아래에 섰다.

영화가 끝나고 내려온 하얀 스크린처럼 대지는 눈으로 덮여 있다.


내 몸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영화 속에서 나는 조연도 못 되는 단역이었다.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고 허둥대다 사라지는 단역이었다. 화려한 봄, 여름도 없었고 풍요로운 가을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조금 억울하기는 하다.

새벽에 일어나 일터로 나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일했고, 교통범칙금이 아까워 신호등 잘 보고 조심스레 운전하여 퇴근했다. 알뜰히 챙겨가는 세금 공제액이 찍힌 월급 명세서도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생각해 보면....

그래, 그렇게 살았으면 됐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다음 영화를 준비하자. 이쯤에서 마른 잎 털어버리듯 미련과 증오를 털어버리고 소중한 기억을 몸에 새기고 옷깃 여미고 바람 속에 서자. 언젠가는 불어올 봄의 향기를 기다리며.


나무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이 나무를 되살려내듯 내 몸에 새겨진 기억의 흔적은 나를 험한 세상에서 버티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그래,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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