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 화청지

by 마정열

녹지대 유지관리 기간제 일은 겨울이면 쉰다. 수목이 얼어붙어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우리도 휴식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이다. 한가하다 못해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모른다. 서너 차례의 나들이도 슬슬 지겨워지고 추운 날씨를 핑계 삼아 집에 틀어박혀 텔레비전 시청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여행 프로그램이 나오면 채널 돌리기를 멈춘다. 나는 여행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편히 안방에 앉아 세계 각처를 여행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행여 내가 가본 곳을 소개할 때면 여행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며 더욱 집중하여 텔레비전 화면을 본다.


텔레비전에서 중국 서안의 이곳저곳을 소개하고 있다. 몇 해 전 겨울에 그곳을 찾았다. 여행 내내 미세 먼지가 도시를 뒤덮었다.


아무래도 서안 여행의 백미는 진시황릉의 병마용이다. 들어서는 순간 맞닥트린 그 웅장함에 압도된 감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화산. 날카롭게 솟은 암석의 봉우리는 무술의 본산지로서의 명성에 조금의 흠결도 없는 장관이었다. 영호충(소설<소오강호, 김용>의 주인공, 화산파의 대사형)이 화산 봉우리를 날아다니며 무술을 수련하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당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는 화청지.


마침 텔레비전 화면에서 화청지를 찾아가는 여행자의 설레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그 화면 위로 몇 해 전 화청지를 찾아가는 내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서안여행 이틀째.

사랑일까? 본능적 욕망일까?

하기야 이 세상에 내가 이해 못 하는 사랑이 부지기수이니 이 관계를 그냥 사랑이라 하자.


화청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 당현종과 양귀비의 만남과 파국을 떠올린다.


‘개원의 치’라고 불리는 태평성대에 당현종은 지쳤을까, 무료했을까?

그때 눈에 띈, 자신의 18번째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부인인 여인.

한눈에 빠진다는 것이 그런 것일까?


현종은 그녀를 화산의 도사로 출가시켜 아들에게서 떼어놓고 궁내에 도교 사원인 태진궁(太眞宮)을 짓고 그녀를 다시 이곳을 관리하는 여관(女冠)으로서 불러들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 22세, 현종은 57세였다.


이 정도면 사랑이다. 지독한 사랑이다. 인정하기로 한다.


상념 끝에 화청지에 도착한다.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 화청지 앞의 조각상이다. 춤추는 양귀비와 그녀를 바라보는 당 현종. 마치 둘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녀에게 온 시선을 빼앗겼으니 변방에서 울리는 북소리도 듣지 못하고....결국 사랑하는 여인도 지키지 못하고....


절도사 안녹산이 난을 일으키고, 현종은 수도 장안을 빠져나가 촉(현 쓰촨성)으로 피난했고, 이 와중에 현종을 호위하던 병사들은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이라고 요구했다. 현종은 어찌할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살을 명했다. 그렇게 양귀비는 죽었다.


욕망의 끝은 그러한가 보다. 돌아보면 허망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현종과 양귀비가 사용하던 온천탕이 그대로 보존되어 여행객을 맞이한다. ‘연화탕(莲花汤)’은 현종이, ‘해당탕(海棠汤)’은 양귀비가, 그보다 먼저 만들어진 ‘성진탕(星辰汤)’은 태종인 이세민이 애용했다 한다.


지금 보면 그냥 웅덩이다.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우리의 머리는 편리하게 천여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목욕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불손하다.


밖으로 나오니 연못이 있고 지금은 썰렁하지만, 여름에는 이곳에서 ‘장한가’가 공연이 된다 한다. 앞서 가던 여인이 말한다.

“여름에 올 걸 그랬다.”

나는 이 황량한 겨울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부귀영화의 허망함이 찬바람과 함께 뼛속 깊이 느껴진다.


못 옆에 백거이의 ‘장한가’가 새겨져 있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했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고 맹세했었지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사랑이란 그런 것인가?

비익조 되고, 연리지 되자고 맹세한 사랑도 결국은 한으로 남는구나.




* 비익조(比翼鳥)는 중국 숭오산(崇吾山)에 산다고 전해지는 새로 날개와 눈이 하나뿐이어서 암수가 몸을 합쳐야만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

* 연리지(連理枝)는 한 나무의 가지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서 나뭇결이 하나로 이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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