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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식 Jul 12. 2020

< 길 위의 명상 >

9. 터닝포인트_한라산둘레길 사려니숲길



  제주도로 내려온 지 4년째 되는 해를 맞이하는 연 초에 나는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비영리사단법인의 운영도 지속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 버렸고, 스승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황망했고, 앞뒤 좌우 모든 방향이 깜깜했다. 모든 게 부질없게 여겨졌다. 나중에 누군가가 일러줬다. 그게 바로 우울증이라고. 방구석에서 꼼짝 않고 텅 빈 영혼으로 멍하니 있을 때 휴대폰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 창 위로 뜬 저장된 이름은 반가운 분이었지만 그땐 그저 시큰둥했다. 곧 전화가 끊어지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마지못해 한참을 있다 받았는데 전화 저편에서 기운차고 밝은 목소리가 전해왔다. “잘 지내는가? 작년에 자네가 나에게 약속했던 거 잊지 않고 있겠지? 갑자기 시간이 나서 제주도로 내려가려는데 이번에 자네가 소개해 주겠다던 좋은 길 좀 안내해줄 수 있겠나?”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명예교수로 계신 이박사님이었다. 이교수님과는 그해 몇 년 전부터 함께 명상을 하면서 알고 지내던 터였는데, 전화를 받기 전 수개월 전에 서울의 한 식사자리에서 전했던 말씀을 떠올려 그때 이야기를 꺼낸 거였다. 정신의학계의 권위자로 명성이 자자하던 때에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돌연 학교에 사표를 내고 인생2막을 시작한 이교수님은 인생의 멘토이자 삶의 길라잡이로 여기고 롤모델로 삼고 있던 분이었다. 그래서 우울증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던 차였지만 예전의 약속을 떠올리며 다른 거절의 핑계감을 떠올리지 못했다. 세상이 귀찮고 삶이 귀찮고 사람이 귀찮은 이 마당에 제주의 길을 안내하고 손님을 맞아야 하는 상황이 도저히 수용 불가능했지만, 그맘때쯤 마음 깊숙이 하나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있었기에 생각을 고쳐 먹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군가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라는 스스로의 다짐을 떠올리며 늘어진 몸에 갈고리를 채어 끌어올렸다. 삶의 시행착오를 바로 잡는 시작을 ‘언사행(言思行) 일치’로 잡고 그것만은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던 참이었기에 이교수님과의 약속을 모른척하고 뭉개고 우울증에만 빠져있자니 도대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였다. 마지못해 손님접대를 빠르게 해치우기로 하고 억지로 약속을 잡았다. 

  그 당시 이교수님께 마음속으로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소개해 드리고 싶었던 길이 한라산생물권보전지역에 자리 잡은 사려니숲이었다. 은퇴 후 이미 존뮤어 트레일과 산티에고 순례길등 세계적인 트레킹 루트를 섭렵한 이교수님께 적당히 그리고 충분히 걸을만한 숲길 코스로 안성맞춤이란 생각에 제주공항에서 516도로로 이내 차를 몰았다. ‘신령스러운 숲’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사려니숲은 1월 초 10센티가 훨씬 넘는 눈에 덮여, 잎을 떨군 활엽수들조차 눈을 한가득 이고 있었고 바닥은 온통 눈 카펫이었다. 이미 수차례 이 길을 걸어본 터였지만 기대하지 못한 뜻밖의 풍광에 나도 놀랐고, 제주도를 이미 수십 번도 더 다녀갔을 이교수님도 전체 길이 10킬로미터의 사려니숲길을 채 1킬로도 걷지 않은 때에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내가 전 세계 좋다는 트레일들을 웬만히 다 걸어보았지만 우리나라 한라산에 이런 멋지고 아름다운 길이 있었다는 것을 왜 이때까지 몰랐을까!” 연신 감탄의 찬사를 쏟아 냈다. 평소 과묵한 분이 저토록 좋아하는 길을 내가 소개했다니 왠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처져있던 어깨도 약간 으쓱해지고 역시 약속을 지키기로 잘한 것일까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을 때쯤 이교수님의 휴대폰이 숲 한가운데에서 울렸다. 내용인즉, 당시 한 방송국에서 연 초 특집 기획 프로그램으로 ‘힐러는 스스로 어떻게 힐링하는가’라는 주제로 기획 편성을 했는데 어디에서 방송의 물꼬를 틔워야 할지 막막하던 차에 담당 PD가 이교수님께 자문을 구하기 위해 전화한 것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이교수님이 힐링하기 위해 제주도에 내려와 한라산 숲길을 걷고 있는데 눈 덮인 한라산숲길의 풍광이 기가 막히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담당PD가 당장 카메라감독과 구성작가와 함께 내려와 그 모습을 동행 취재해도 좋겠냐는 이야기에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교수님은 사정이 이러저러한데 내가 괜찮다면 담당PD도 좋은 사람이고 하니 2박3일 정도 제주도의 좋은 길들을 안내해 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얼른 하루 손님치레 숲길 트레킹 가이드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우울증 환자 코스프레를 하려고 작정하던 차였으나, 본의 아니게 일이 점점 커져 아예 몇박 몇일 제주힐링트레킹여행 안내역할까지 떠맡게 되었다. 

  세상일이 내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나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눈 덮인 사려니숲길을 4시간 정도 천천히 걷고 나자 내 안에서도 작지 않은 변화가 생겼음이 느껴졌다. 몇 시간 동안의 자연에서의 걷기가 끝날 때쯤 되자, 나 스스로 우울하고 체념하던 지난 무거운 기분은 오간데 없어지고 몸과 마음이 가볍고 생기가 돌며 온 몸에 힘이 재충전되는 듯 날아갈 것만 같았다. 영혼까지 상쾌해졌다고 표현하면 과장일런가. 제주도로 내려와 모든 열정과 시간과 돈을 쏟아 부어 비영리사단법인의 일을 하면서도 제대로 느껴본 적 없던 삶의 보람을 우연한 기회로 모시게 된 지인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계기로 확인하게 된 때문일까. 그간 해온 일과 경험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으며, 건강과 힐링의 전문가로부터 세상에 드문 귀한 숲길을 안내해 주어 고맙다는 진심 어린 인사까지 받으며 그 반응에 내심 놀랐다. 어쩌면 그간의 시행착오가 새로운 시작의 발판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의 빛이 저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실제 그 빛은 점멸하다 곧 꺼져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었다. 며칠간의 트레킹 안내일정을 무사히 잘 마무리하자 이교수님이 한 가지 제안을 더했다. 서울의 모일간지 산하 건강을 전문으로 하는 한 계열사에서 건강힐링전문 여행사업본부를 발족해서 그해부터 새로운 여행프로그램들을 추진하기로 했는데 사업자문을 위해 이교수님을 자문위원장으로 위촉한 터였다고, 그런데 때마침 그때 사업본부장이 제주도로 내려와 있다고 연락이 왔으니 한번 같이 만나보면 어떻겠느냐고 또다른 제안을 했다. 두 사람을 연결하면 왠지 뭔가 사업구성과 운영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며 부담 갖지 말고 그냥 편하게 만나보자고 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새삼 안 될 이유가 뭘까 싶어 멘토의 제안을 즉각 받아들여 본부장을 만났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나 그해 연말 본부장과 나는 제주도에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하고 서로 공동대표를 맡아 운영하기로 했다. 당시 국내 처음으로 제주도 건강힐링여행프로그램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업을 합작으로 시작한 것이다. 상대편이 홍보마케팅을 담당하고 나는 기획과 현지운영을 맡아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삶의 터닝포인트는 전혀 예기치 못한 때에 예기치 못한 사람을 통해 예기치 못한 형태로 다가온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하며 삶의 밑바닥에서 우울증을 앓으며 허우적거리던 절망의 시간에 아주 우연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     


여덟 번째 길한라산둘레길 사려니숲길코스 (사려니숲길 

    

  2020년 7월 중순 초여름, 6개월이 넘도록 계속되는 코로나바이러스, 겉도는 북핵이슈, 미중간의 헤게모니, 한일간의 역사, 미투운동 등등 대한민국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가장 분주하고 뜨거운 나라, one-top dynamic country임에 분명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지진이라도 나고 화산이라도 폭발해서 세상이 뒤집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사는 사람도 있을 테고, 오늘도 무사히 별일 없이 조용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전자는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람일 확률이 높고 후자는 지금 그대로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일 확률이 높겠다. 불만가득한 사람도 평화주의자도 지금의 대한민국은 때론 너무나도 날선 곳이어서 며칠이라도 그곳에서 떠나와 혼자만의 쉼을 찾게 된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서 혼자만의 쉼을 잊은 지 오래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는 방법을 몰라 난감하기만 하다. ‘휴식’이 도대체 뭘까. 사전을 뒤져 보니 ‘하던 일을 멈추고 잠깐 동안 쉼’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하던 일을 멈추고 잠깐 동안 쉼’은 또 어떻게 하는가. 아무런 가이드라인이 없다. ‘휴식’이란 단어의 한자는 ‘休息’이다. 글자를 하나씩 들여다보면 휴식하는 방법에 대한 친절한 안내가 이미 모두 그 속에 담겨있다. 休(사람이 나무 아래에서)와 息(깊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이라고.      


   요즘은 꽤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주말이면 사려니숲길은 조금 번잡스럽기조차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변곡점을 가져다준 그리고 우울증을 극복하게 해 주었던 이야기가 담긴 사려니숲길은 한라산 숲길의 첫 번째 길로 소개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연중 개방중인 10km 구간은 서너 시간을 넓고 편안한 숲길을 동행하는 이와 나란히 그리고 편안하게 걸으며 그의 말 못 했던 속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때론 나의 지나온 질곡의 이야기도 다시 건네는 것으로 서로를 위로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사려니숲길을 찾을 때면 숲길 입구에서 출발 전에 함께 동행하는 분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권한다. 가슴을 활짝 펴고 콧구멍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시선은 숲 속 깊게 두고 이따금 숲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호흡을 아랫배까지 깊게 하라고 말이다. 내쉬는 숨에 도시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모두 쏟아버리고, 마지막 숨 한 방울까지 전부 내쉰 그 끝에서 반동으로 자연스럽게 들숨을 쉬라고. 먼저 비우고 그 반동으로 스스로 채워지게, 한라산 깊은 숲에서의 또 다른 숨쉬기 방법을 전하며 제주휴식여행으로 나는 지금도 꾸준히 사려니숲길을 찾는다. 

  지금은 붉은오름 입구 쪽에 대형주차장이 마련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에 차를 대고 사려니숲을 들어가지만, 원래는 516도로를 따라 제주시에서 서귀포시로 넘어가다 보면 성판악휴게소에 못 미쳐 교래리로 빠지는 왼쪽 길이 나오는데 거기 비자림로에 있는 사려니숲 입구에서 걷기를 시작하는 편이 훨씬 좋다. 자연스럽게 길이 한라산 방면에서 해안 방면으로 역기역자로 꺾이는 흐름이 부드럽다. 길의 2/3 지점에 쉼터가 하나 있는데 바로 옆 ‘월든의 명상의 숲’이라고 이름 붙인 삼나무 숲은 놓치기 쉬운 곳이므로 지나치지 말고 들어가 보자. 불과 500미터 정도의 길이 밖에 되지 않는 명상의 숲에선 일행과의 거리를 이삼십 미터 정도 띄우고 저마다 아무 말 없이 침묵 속에서 말없이 숲과 자신과의 교감을 나누며 깊은 호흡과 함께하는 명상적 걷기를 추천한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4시간이면 반대편 붉은오름 입구 쪽에 다다르게 되는데 최근 이곳 초록 이끼 가득한 삼나무 숲은 한라산 사진 찍기의 명소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갑작스레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들의 소리로 조용했던 숲이 와글거리면 사려니숲길이 거의 끝나고 있다는 뜻이다. 참고로 매년 5월말~6월초 경 약 2주간동안 사려니숲길 중 평소에는 탐방이 제한된 구간들이 모두 개방되는 시기가 있다. 특히 연중개방구간 중에서 ‘월든의 명상의 숲’에서 붉은오름입구 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 사려니오름 방향으로 꺾어져 계속되는 10km를 걸어보자. 조금 거리가 길어도 평소에는 갈 수 없는 곳이므로 사람의 인적이 닿지 않아 다시 살아나고 있는 사려니숲의 또 다른 풍광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미리 문의해서 개방 시기를 확인하고 가보길 추천한다.         

 

* 찾아가는길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212번 버스를 타면 비자림로에 있는 정류장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면 된다. 자가 차량이 있다면 붉은오름입구 쪽 주차장에 차를 대고 교래콜택시(064-727-0082)를 불러 반대쪽 비자림로에 있는 입구로 이동해서 출발하길 추천한다.   

   

* 주위추천명소     


- 제주돌문화공원

사려니숲 인근에 돌과 바람과 여자의 섬 제주도를 모두 한 곳에서 담아 표현해 내고 있는 곳이 있다. 교래리에 위치한 제주돌문화공원이 그곳이다. 수십 년간 그곳에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있는 한 사람의 제주도 사랑이 수십만 평의 공간 위에서 제주도 전체를 만나게 하는 자연과 문화와 예술의 장소로 거듭나게 한 곳이다. 제주도의 화산분출과정과 설문대할망의 창조설화이야기와 제주문화예술의 흐름을 모두 알고 싶다면 결코 빠트려선 안 될 곳이다. 공원이지만 전체를 둘러보는데 족히 몇 시간이 소요될 정도로 넓은 곳이므로 시간이 없는 분들은 그냥 산책을 겸해도 손색이 없다. 


- 선흘 방주할머니식당 

제주도 한라산 동쪽 편 인근을 지난다면 이곳에서의 식사를 빼먹지 말라고 권하는 제주에서 두 번째 손꼽는 향토별미 맛집이다. 아들은 검정콩을 키우고 칠순의 어머니는 매일 두부를 만드는데 여름철 이곳의 검정콩국수와 함께 새우젓만으로 간을 내어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두부전골은 잊었던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리게 하는 제주도 대표 건강음식이다. 비건채식을 하는 나는 가끔 검정콩국수 맛을 보기 위해 모슬포에서 한라산 너머 정반대에 있는 선흘 방주할머니식당을 일부러 찾곤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할머니는 일요일엔 문을 열지 않는다. (064-783-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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