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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비 Jun 04. 2024

똑똑똑! 여기서 '참여 관찰'
할 수 있을까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른다. 늘 그랬다. 어떤 결심이나 굵직한 결정이 필요한 일들은 대부분 용기와 도전을 통해 성취를 했다. 일상에서는 용기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닌 듯하고, 매사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가슴에서 올라와서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되면 몇 가지 선택지와 대안들을 탐색한 뒤 용기를 내 도전한다. 그런 일들은 나의 삶에 '터닝포인트'를 만들어낸 지점이었다. 마음을 먹는다. 용기를 낸다. 도전한다. 이런 3단계 프로세스라고 할까. 이렇게 할 수 있는 마음에는 처음 해보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편이기 때문이다. 시작하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실패가 경험 자산이라는 마인드셋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내 삶을 무대에 올린다면, 커리어 1막에 해당되는 '정치권의 17년의 시간'의 첫 시작도 그랬다.

     

호주 시드니 소재 맥콰리 대학교의 International Communication 학과에서 석사 학위(Master of Arts)를 받고, 박사 과정도 지도교수였던 Phillp Bell 교수님과 함께 하기로 했다. 그즈음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UNSW)에서 미디어 학과가 개설되었고, 교수님께서는 UNSW 학교로 초빙되어 가시게 되었다. 나도 교수님을 따라 UNSW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UNSW는 시드니 시티(City)를 중심으로 남쪽(South)에 위치해 있었는데, 북쪽(North)에 위치한 맥콰리 대학교의 캠퍼스 분위기보다 좀 더 자유롭고 역동적인 느낌이 들었다. 박사 논문의 주제와 방향성을 잡는 데는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대학원 시절부터 '캠페인'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큰 방향을 사회적 캠페인 혹은 광고 캠페인에 대한 쪽으로 정했다. 당시가 한국에서는 큰 정치적 변곡점이 될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던 해였다. 97년 대선은 민주화 이후 최초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선거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된 선거다. '여당 신한국당'과 '야당 새정치국민회의' 간 치열한 경쟁이 있던 선거였다IMF 외환위기 상황에서 국민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변화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선거였고, 경제 문제와 함께 문화정책 등 다양한 이슈들이 주요 관심사였다. 한국의 역사적 선거라 해외에서도 굉장히 관심 있게 바라보았던 것 같다. 


사회적 이슈가 선거의 핵심이 되면서, 평소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도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실 정치보다는 '선거 캠페인'에 더 큰 관심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정치권'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 때문이었다. 지금은 정치가 이분법적 대립으로 격화되어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 같아 안타깝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정치가 살아있던 시절'이었기에, 우리나라를 잘 이끌어갈 것이라 믿었던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정치인들이 우리나라를 이끄는 리딩 그룹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곳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필립 벨 교수님과 '한국의 정치 캠페인과 관련된 논문'을 써보겠다고 상의했다. 필립 벨 교수님은 질적연구방법론 중 참여관찰을 소개해주시며 참여관찰을 위한 비용 지원도 학교에서는 제공이 가능하다고 했다. 참여관찰은 연구자가 직접 연구 대상 집단에 참여하여 관찰하고 기록하는 방법으로, 선거 캠페인 과정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비행기표를 지원받아 97년 중반 역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유학을 위해 호주로 갔는데 다시 한국에 와서 연구를 하는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정치권에 일면식도 없었고,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막막한 채 오로지 선거캠페인을 직접 현장에서 보고 선거 캠페인의 실제 과정, 참여자들의 행동과 상호작용, 의사결정 과정 등을 생생하게 관찰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를 통해 선거 캠페인 과정에 대한 풍부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고 기존 연구에서 다루지 못했던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어떤 계획도 없었다. 어떻게 참여관찰을 해야 할지 정해진 것은 없었다. 늘 그렇듯이 어떻게 흘러갈 것이라는 확신만 있었다.



대학교 교수님들께 일시 귀국 인사를 드리러 갔다. 특히 김용은 교수님께 한국에 들어온 계기에 대한 이야기와 논문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등에 대해 상의를 드렸는데, 교수님께서 인문사회대학교의 정치외교학과 교수님 한 분을 소개해주셨다. 정치학과 교수님이셨기에 각 정당인, 한나라당, 새정치국민회의, 국민신당의 관계자 연락처를 주셨다. 그저 전화번호를 공유해 주신 것뿐인데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다음부터는 내가 또 내 앞에 있는 문을 직접 열어야 했다. 지체할 것 없이 그분들에게 연락을 드려 서울로 올라가 정당 3곳을 돌아다녔다. 지금이야 선거철 자원봉사 개념이 자리 잡아 많은 분들이 자원봉사로 참여를 하고 계신다. 어떤 연고도 없이 전화를 걸어 "참여관찰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일은 내가 아는 한 없었다. 지구당이나 후원자 등 연줄에 의해 정당에 발을 들여놓던 시절이었고, 특히 야당은 공채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색깔론, 북풍조작, 네거티브 전략이 난무했던 시절이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개방성이 제한적이라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심했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사람을 들이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있었던 것 같다. 당연했다. 한나라당에서는 담당자가 바쁘셨는지 전화조차 받지 않아 기회가 닿지 않았다. 국민신당 관계자는 당사에서 만났지만 경계가 심했다. 소개받은 새정치국민회의 관계자는 고인이 되신 이용희 기조실장님이었다. 맨해튼 호텔의 커피숍에서 뵙기로 하고 여의도에 왔는데, 빌딩만 있고 커피숍이나 식당이 없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나중에 일하게 되니 지하에 식당들이 들어서 있던 모습이 정말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정당 세 곳을 돌며 참여관찰을 할 수 있는지 의사타진을 했지만, 뜬금없이 찾아온 나를 낯설게 바라다보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문을 열어 준 곳이 있었다. 김대중대통령 후보자가 있던 '새정치국민회의'다.


호텔 2층 커피숍에서 만난 이용희실장님은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셨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더니 "대변인실’에서 참여관찰을 해보면 논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정동영대변인께 전화를 드렸는데, 당일은 정동영 대변인께서 선거로 지방출장 중이셨다. 만약 대변인실에서 수락을 하지 않는다면 본인이 있는 기획조정실에 와서 일해보라는 말씀도 함께 해주셨다. 마치 원래 알고 있거나 지인 소개로 간 사람을 대해 주시는 것처럼 대해주셔서 감사했다. 다음 날, 나는 대변인실로 가서 정동영 대변인과 첫인사를 나눴고 흔쾌히 여기서 일해보라고 하셨다. 대변인실 국장님이셨던 유용규 국장님께 자원봉사자로서 담당 업무를 받고 참여관찰을 시작한 것이 97년 11월 3일이었다. 필립 벨 교수님을 시작으로 김용은 교수님, 정치외교학과 교수님, 이용희실장님, 정동영대변인, 유용규 국장님까지 이어지는 고마우신 분들 덕분에 나의 1막 커리어가 시작이 되었다. 중요한 지점마나 내게는 '귀한 인연'들이 많이 계셨다. 나에게 어떤 대가나 보답을 기대하지 않으시고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과 지지, 기대를 해주셨고 나는 그분들에게 감사한 그 마음으로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정신적 후원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런 귀한 인연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은 하나다. 용기를 내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내 앞에 있는 굳게 닫힌 문을 열기만 했다. 때로는 어떤 문을 열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었지만 떨리는 손과 마음으로 그 문을 열었을 뿐이다. 그러자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좋은 사람들이 나타났고, 나는 시간과 상황의 흐름 속에서 파도를 탈 수 있었다. 용기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손을 뻗어 내 앞에 있는 문의 손잡이를 잡는 것부터 시작이다. 내가 열지 못하고 있는 문은 무엇일까? 오늘은 그 문에 손을 뻗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열어야 할 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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