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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비 Jun 07. 2024

맥락과 흐름을 아는 것의 편안함

"여기서 어떻게 일하게 되었어요?"

정당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던 질문 중 손에 꼽을 만큼 자주 듣던 질문이다. 그 질문 속에는 '운동권 출신'도 아닌 듯한데, 어떻게 진보 진영에서 일하게 되었을까? 든든한 "배경"이 있는가?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나의 의지가 있다고 꼭 내가 결정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는다. 내 커리어의 1막도 그렇게 시작했다. 삶의 레시피가 있다 해도 예기치 않는 맛의 음식이 나오 듯이 말이다. 기본 재료인 '나의 의지' 한 스푼에 '주변의 환경'들이 재료가 되어서 나온 음식 같았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맛있어 그릇을 싹싹 비워낼 때 그 희열감이 내게도 있었다.


선거 캠페인이라는 큰 주제를 들고 참여관찰을 통해 가설과 검증을 해보고 싶은 '의지'로 발을 들였다. 1997년 11월 3일부터 12월 18일 선거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치의 큰 획을 그었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직접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실에서 자원봉사로 함께 참여하며 '선거판' 한가운데서 역사적 순간들을 경험했다. 그 어느 선거보다 역동적이고 중요한 이슈들도 많았다. 선거는 결과까지 완벽했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1.53%, 390,557표 차로 이기며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극적인 승리였다. 선거가 이겨 기분 좋게 다시 호주로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인생은 늘 그렇듯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만은 않았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나는 한국에 남는 결정을 했다. 하나는 선거가 이기니 예상치 못하게 너무 바빴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청와대로 들어갈 인수위원회도 꾸려지고 청와대에 입성할 인재들도 필요했다. 공식 선거가 끝났으니 그만 나오겠다는 이야기를 할 세도 없이 매일매일이 바쁘게 흘러갔다. 어차피 방학 기간이니 더 도와드리는 상황이 되었다. 만년 야당에서 처음으로 여당이 되었기에 경험도 부족했고, 일손도 한 명이 귀했다. 두 번째 이유는 더 강력했다 IMF가 한국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호주로 들어가야 할 시기가 오고, 당은 여당으로서 첫 공채로 인재를 채용하려는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대변인이셨던 정동영 대변인께서 "어차피 이 쪽 분야에 있을 것 같으면,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의미 있고 재미난 경험들을 했고, 학업은 일단 휴학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결정하는데 큰 고민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떠났던 유학길을 또 갑작스럽게 정리하게 되었다. 처음에도 길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기간이 17년간이나 이어질 줄이야. 이것이 인생이 아닐까. 어쩌다 생각한다. 만약 내가 그때 호주로 돌아갔더라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고.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우리 삶이 희망과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정당인이 되었다. 정권을 잡은 '새정치국민회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2000년 1월 김대중 대통령을 총재로 추대하며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 재편하는 창당을 하게 되었다. 이때 창당을 준비하며 '대외협력부'로 잠시 옮겨 일을 도와드리고는 대변인실에서 5년간 정당 생활을 했다. 내가 있을 당시에는 대변인 1명, 부대변인 6~7명, 대변인실 국장을 필두로 행정실 직원들로 구성이 되었다. 정동영 대변인을 시작으로 5년 동안 11분의 대변인을 모셨다. 대변인실과 출입기자실이 함께 있었는데, 여당이 되니 출입기자 수도 1/3 이상이 늘었다. 중앙지와 지방지 기자 250명 정도가 함께 출입하며 일하던 공간이었다. 처음 대변인실에 출근을 했을 때 여성기자가 하나도 없었던 것에 놀랐다. 나중에는 4~5명까지 늘었다. 지금은 언론에서 보이는 기자들을 보면 여성 기자가 예전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졌을 느낀다. 각 언론사별로 반장 1명과 출입기자들이 연차로 2명~8명까지 출입을 했다. 당 대표가 지방 행사를 가거나 전당대회, 대선 후보자 경선 등을 할 때는 대변인실에서도 출입기자들과 함께 행사장을 다니며 기자단 지원을 한다. 기사를 공정하게 우리 쪽 입장을 잘 반영하여 쓸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대변인단이 브리핑을 하는 것을 기자들이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보도자료로 정리하는 일도 우리의 일이고, 자료를 잘 찾아 브리핑이나 기자들에게 대응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은 기자들이 대변인의 브리핑을 노트북으로 받아 적지만 당시는 '기자수첩'이라는 손바닥에 들어갈 사이즈의 작은 노트에 주요 정치인들의 멘트를 받아 적으며 취재를 했다. 우리도 기자들과 함께 기자수첩에 대변인을 포함 지도부의 브리핑을 열심히 받아 적고 사무실에 와서 컴퓨터에 옮겨 공식 브리핑 자료로 배포를 하였다. 속기사도 아닌데 말하는 것을 토씨하나 놓치지 않고 적으려 하면 내가 쓴 글씨지만 정말 무슨 말을 썼는지 모를 때도 많았다. 나는 이때 내 글씨체가 많이 바뀌었다. 원래 경필부에서 펜글씨를 배우고, 중학교 때는 칠판에 선생님의 그날 가르치실 노트를 칠판에 필사를 했을 정도로 글씨는 잘 쓰는 편이었다. 몇 년을 이렇게 날아가는 글씨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씨체가 바뀌는 경험도 했다. '가판'이 있던 시절이라 저녁에는 당직과 주말도 당직을 서는 시스템이라 워라밸을 지킬 수 없는 시스템이었지만 사람들도 좋았고, 일들도 늘 재밌었다. 


일을 하면서 그럼에도 출입기자들과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다. 매일 같은 곳으로 출근을 하며 얼굴을 보는 친한 관계이지만 내가 하는 말들이 하나의 정보가 될 수 있기에 굉장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디서 기사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늘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나는 맥락이나 흐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속해 있던 진보 진영은 대부분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직접 민주화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조금만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었다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대학 시절에 민주화 운동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졌을 정도의 적당한 관심을 보였을 뿐 실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정치권에 들어온 것도 학업의 연장선에서 바라봤기에 정치인들을 들어와서 알게 되었다. 자원봉사로 시작할 때는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본격적으로 정당인이 되어서 정치권에서 일하려다 보니 그 지점이 나에게 핸디캡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는 사람이고 흐름이다. "정치는 생물이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정치 현상이 생물과 유사하게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시간과 상황에 따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동적이기 때문이다처음에는 무엇이 불편한지 잘 몰랐다. 대화의 흐름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서 내가 이쪽 맥락을 잘 모르는구나 싶었지만 조급해하지 않았다. 조급해한다고 내가 그 수년의 시간들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피하지 않고 그 시간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맥락과 흐름 속에 조금씩 편안해지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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