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간사하다.
바깥은 찜통이다.
비가 와서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무심하게도 바깥은 찜통이다. 어쩌면 만두를 내놔도 바로 익어버릴지도 모를 그런 더위에 월요일의 출근을 맞이하였다. 이럴 땐 추웠던 날이 그리워진다. 어렴풋한 기억으론 추웠던 날엔 더운 날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 인간의 마음이 아니, 내 마음은 지독하게 간사하다.
뭐 그러든지 말든지 세상에 피해라곤 1도 주지 않을 간사함이니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더운 날에 추운 날을 그리워하는 거 따위야. 그런데 문득 떠오른 연상이 좀 터무니없다. 마치 SNS 알고리즘에 의해 아무 연관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영상이 스쳐 지나가듯 불쑥 떠 올랐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개월 전의 몹시도 추웠던 겨울날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무척이나 평범할 것 같았던 그날 아침은 쳇바퀴를 돌고 있는 한 마리의 다람쥐처럼 무한 반복의 출근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늘 오가던 어느 상가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가 나왔다. 보통의 연인이라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든지 아니면 팔짱을 끼고 아침을 먹으러 간다든지 아니면 헤어지더라도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본다든지 하는 누가 봐도 연인이라는 티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나오자마자 아무런 말도 없이 심지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로 각자의 갈길을 향해 갔다. 그들이 나온 건물에는 몇 개의 술집이 있기는 했지만 이른 아침까지 영업을 하는 술집은 없었다. 술집 말고 딱 한 군데 영업을 하는 곳이 있었다. 모텔이었다.
이럴 땐 모른 척해주는 게 예의다. 일부러 시선을 외면해 주기 위해 아무런 것도 못 봤던 것처럼 애써 고개 숙여 걸었다. 모른 척해준다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그것만큼 티 나는 행동은 없으리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름 CPU를 가동해 계산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둘의 관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대체 사이였길래 이 둘은 아침부터 건물에서 나와 서로 매정하게 한마디 말도 없이 등을 돌려 각자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말입니다. 그 둘은 헤어지기로 작정한 연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고 저쩌고.....'
그날의 아침을 대충 이런 모드로 기억했던 것 같다.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 그날의 장면이 수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젊었던 날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하룻밤이었다 하더라도 괜찮고 싸우고 나서 냉전 중이라 하더라도 괜찮고 이별을 하더라도 괜찮고 뭘 해도 괜찮았을 젊은 날 아니었나. 그때는 왜 그리 망설이지만 않았더라면.
남자야, 하룻밤이 아니었다면 무조건 그냥 가서 미안하다고 해라. 진심이든 진심이 아니든 미안하다고 해라. 이참에 여자친구의 성격을 바꿔보겠다고 작심한다고 그게 그리 쉽게 바뀌어지는 게 아니다. 타인의 성격이 바뀌길 바라느니 서쪽에서 해가 뜨길 바라는 게 빠르다. 어차피 헤어지면 또 다른 외모의 비슷한 성격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너는 그런 성격만 만나게 되어 있으니까. 이런들 어떠하랴 저런들 어떠하랴. 옆에 없어서 보고 싶은 날로 맘고생 하기보다 그냥 그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그녀도 살포시 안아줄 거다.
상상은 여기까지만.
사무실 에어컨 바람에 머리를 후들겨 맞고 나니 찜통더위가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에어컨 바람 앞에 간사한 마음만 살랑거린다. 부디 내일은 추운 겨울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덥지 않기를. 작은 바람 앞에서도 간사한 인간이 되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