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까요? | 이번 생은 처음이라
"이혼을 하더라도, 결혼은 한 번 해볼만한 경험이야." 대학교 3학년, 낙엽이 지는 가을이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강의실에서 교수님의 농담 섞인 조언이 날카롭게 귀에 꽂혔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잘못된 결혼은 모두를 불행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애라도 낳게 되면 그 애는 어쩌라고.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저, 결혼이 너무도 큰 리스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사실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첫 다짐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부모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싸웠고, 그 속에서 나는 지쳐갔다. 방문을 닫고 이불 속에 숨어도 고성은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차라리 귀가 멀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모님이 차라리 이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들먹이며 “너희 때문에 이혼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부모님이 이혼한 친구들이 부러울 정도였다. 적어도 그들의 집은 소음은 덜할 테니까. 이렇게 자라면서 나는 결혼이란 불행을 자초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내가 서른이 넘어서,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됐다니 놀랍지 않은가?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집을 나와 자취하면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결혼 생활을 보면서 나의 생각은 점점 바뀌었다.
"잘 맞는 사람 만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더라고." 자유분방하던 친구 A가 청첩장을 건네며 그렇게 말했다. 결혼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의 말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A 역시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어 연애만 주로 했는데, 한 가지 경험이 그녀의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옆집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너무도 사이가 좋더라면서, 그렇게 서로에게 맞는 상대를 만나면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A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녀는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결혼이 그렇게 나쁜 선택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되었다. 중요한 건 ‘누구와’ 결혼하느냐는 것이었다.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 또 다른 계기는 tvN <이번 생은 처음이라(2017)>였다. 철저한 비혼주의자였던 남자 주인공 남세희(이민기)가 결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 과정이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흥미로웠다. 그에게 결혼은 서로에게 이상적인 하우스메이트가 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랑이 없어도 가능했다. 그렇기에 윤지호(정소민)에게 결혼을 제안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계약'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되는데,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랑이 싹트게 된다. 자연스레 결혼에 대한 생각도 서서히 바뀌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필요에 의한 계약이 아닌 서로에 대한 애정이 전제된 '진짜' 결혼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자칭 "도라이 부부"라고 할 정도로 결혼 생활이 독특한 것도 주목할 점이다. 명절에 각자의 집으로 가는가 하면, 1년마다 계약 내용을 갱신하며 살아가는데, 드라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옆에 있는 이 사람과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결혼이든 비혼이든 혼인 신고를 하든 안 하든 무엇을 택해도 생각보다 그렇게 심각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친구 A의 결혼 생활, 그리고 드라마 캐릭터들의 변천사를 보면서, 그간 결혼을 너무 경직되게만 바라봤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결혼은 그저 행복한 삶을 위한,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뜻이다. 혼자일 때보다 행복하고, 안정되게 살 수 있다면 결혼 역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
이제 나는 결혼을 무겁게 생각하기보다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는 데 집중하려 한다. 내가 선택한 삶이 나를 더 행복하고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면, 그게 바로 나에게 맞는 결정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