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평가 시급한 김삼순 | 내 이름은 김삼순
"결혼 생각 있어요? 우리 부모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데."
결혼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무겁게 다가온 적이 있었을까? 그 말에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남자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초면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실례인지 그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쪽 부모님을 뵐 일은 없을 것 같네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그렇게 말할 용기는 없었다.
주말 오후의 '다대다' 미팅. 서른 다섯이라지만 마흔다섯이라고 해도 납득이 가는 비주얼을 한 남자와의 대화는 지루했다. 그의 말은 의미 없는 메아리처럼 들려왔고, 대화에 주어진 15분의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고된 시간이 이어지다 기적적으로 다음 상대로 넘어갔다. 그 후로도 몇몇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눴으나 끌림이 있었던 상대는 없었다. 대화 시간이 끝나고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 이름을 3지망까지 적어 사회자에게 제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남자들과의 대화가 끝났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여기에 왜 온 걸까. 과연, 귀한 주말을 허비할 만큼 가치 있는 시간이었나?
"오늘은 남자분들이 굉장히 적극적이셨네요." 곧이어 결과 발표를 하는데, 사회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 눈은 비슷하다고, 나처럼 생각한 여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기권한 여자들이 많은데 커플이 탄생할 리가 없었다. 주변을 살펴 보니, 나와 긴 시간을 함께했던 여자들의 안색도 어두웠다. 결혼 적령기라는 압박과 외로움에 못 이겨 나온 자리에서, 나나 그녀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도 실패했다. 대체 괜찮은 남자들은 어디로 간 걸까.
자리를 뜨면서 문득 MBC <내 이름은 김삼순(2005)> 한 장면이 떠올랐다. 드라마에선 '우리가 괜찮은 남자를 만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잘생기고 착한 남자는 이미 결혼했고, 잘생기고 착하고 미혼이고 돈 많은 남자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 방영 당시에도 지극히 현실적인 '팩폭'에 몸서리쳤던 기억이 나는데, 그와 동시에 바로 고개를 갸웃거린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주인공 김삼순은 당시에도 "난 저렇게 안 살아야지"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호불호가 갈리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일 끝나고 집에 돌아와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양푼비빔밥에 소주를 원샷하는 김삼순, 그런 김삼순이 '제법 괜찮은' 남자주인공과 연애하는 내용이 드라마의 주된 이야기이기에, 역시 <내 이름은 김삼순>마저 현실과 간극이 있는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다시 만난 김삼순은 내가 그렇게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쉽게 말해, 김삼순 역시 '괜찮은' 사람이었기에 비슷한 수준의 남자를 만난 것이었다.
드라마가 방영되던 2005년은 그녀에게 너무나 매몰찼다. 당시 '노처녀 캐릭터'로 설정됐던 그녀의 나이는 고작 30살에 불과했다. 당시 여자들의 초혼 연령이 27.7살이었다는 것을 고려해도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심지어 그녀는 프랑스 명문 요리학교 출신에 유명호텔 파티셰를 거쳐 개인 가게를 운영할 정도로 엄청난 스펙의 소유자였다. 요즘이라면 SNS 인플루언서로 활동해도 손색 없을 정도. 그렇게 대단한 캐릭터가 고작 혼기를 놓쳐 결혼에 연연하는 캐릭터로 소비된 당시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완전히 달라졌을까.
"내년엔 꼭 갈 거야." 결혼하지 않은, (적어도 비혼은 아닌) 삼십대 미혼의 주된 관심사는 결혼이다. 하나둘 청첩장을 건네는 친구들을 보며, 몇몇은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섣부른 다짐을 늘어놓는다. 짝이 없는 친구들은 부지런히 이성을 만나러 다닌다. 김삼순이 맞선을 보러다녔다면 요즘 친구들은 소개팅과 모임, 그리고 데이팅앱까지 만남의 경로가 좀더 넓어진 게 차이라면 차이점일 것이다. 이렇게 보니, '결혼 적령기'로 여겨지는 나이만 좀더 늦어졌을 뿐 나머지는 그 시절과 별반 다른 게 없구나 싶다. 나 역시, '더 나이 먹기 전에 가야지' 싶다가도 인연이 쉽게 찾아오지 않는 현실에 초조해지기도 했다. 내 나이는 고작 김삼순보다 몇 살 더 많은 축에 속할 뿐이었는데도.
그렇게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마음을 비우는 시절이 있었다. 굳이 누군가를 만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깨달음을 얻은 것도 한몫했다. 결국 모든 것은 '끼리끼리'라는 것. 나부터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그런 상대를 만난다는 불변의 진리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인가.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이상형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한 끝에, 내가 먼저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나 자신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최소 네다섯번은 운동을 하며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았고, 매일 아침 책을 읽으며 마음의 여유를 키워갔다. 그렇게 간절함을 버리고 나에게 집중하기 시작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여유가 있어야 나의 매력을 온전히 알아주는 인연이 찾아올 거란 믿음 또한 현실이 됐다.
이 순간, 다시금 드라마 마지막회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김삼순은 남자친구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다. 심지어 결혼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미리 두려워하진 않겠다"라고 말한다.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김삼순처럼 나 역시 이제는 안다. 나이에 연연하지 않더라도, 결혼과 무관하게 내 삶은 언제나 괜찮을 거라는 것을. 내가 해야 할 일은 두려움을 떨쳐내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김삼순처럼 나도 내 삶을 스스로 선택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열심히 케이크를 굽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나 김삼순을 사랑하는 것
시간은 흐르고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하는 것. 그렇게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이 김삼순에게 배운 진정한 사랑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