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추앙'의 장소로 | 나의 해방일지
"나 며칠 전에 스타벅스에서 헤어졌어." 몇 년 전 친구들과 카페에 모였는데, 공교롭게도 장소가 스타벅스였다. "여기서?" 한 친구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여긴 아니고, 다른 지점에서." 웃음을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지만, 속은 타들어갔다.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기엔 가볍지만은 않았던 이별이었기에.
친구들은 갑작스러운 내 고백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 후, 친구 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나는 웃음 지으려 애쓰며 손에 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괜찮으니까 말한 거지. "
차분하게 넘기려 했지만, 내 목소리는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묻는 질문들이 내 마음속 상처를 다시 헤집는 것 같았다. 가볍게 넘기려던 농담조차 묵직하게 가슴에 박혔다.
왜 항상 스타벅스에서 이별을 했을까? 아마도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너무나 평범한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한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감성적인 카페에서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나로서는 너무 벅찬 일이었으니까. 스타벅스는 너무 튀지도 않고, 딱 무난했다. 그렇기에 그곳을 떠나는 순간, 내가 아파했던 기억도 금방 지나가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나눈 말들은 그렇게 쉽게 지워지진 않았다.
그날도 스타벅스였다. 주문한 커피를 받자마자 우리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커피 잔을 쥔 그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나는 그 순간,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이제 더는 설레지 않아."
그의 말은 예전에도 들었던 익숙한 대사였지만, 이번엔 더욱 차갑게 다가왔다. 나도 대답을 해야 할 텐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가슴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속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오래 사귀면 익숙해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계속 설레기만 하면 심장에 문제가 있는 거지' 하지만 그 말을 꺼내면 상대방도, 나도 더 불편해질 걸 알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염세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새로운 만남이 시작될 때조차 끝을 떠올렸다. 그렇게 시작한 연애가 잘 될 리 없었다. 그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나를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건 그 XX 때문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정작 아픈 건 나 자신이었다.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무거운 돌덩이가 남아 있는 듯했다. 이별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아물지 않았고, 나는 사랑이 끝날 때마다 더 깊은 공허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순간에도,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마음속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우연히 JTBC <나의 해방일지>를 보게 되었다. 염미정이 구씨에게 한 말 한 마디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그 말은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나 역시 여러 번의 만남 속에서 결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껴왔으니까.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미정의 선택은 나와 달랐다. 상처를 받고도 구씨를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평안을 빌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젠 이렇게 마음을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날 이후, 마음이 바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불안함을 느꼈고, 때로는 끝을 먼저 생각했다. 그럼에도 미정의 말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달리 먹으려 스스로를 다독였다. 먼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주어진 순간 순간을 온전히 느껴보려고 한 것이다. 상대의 결점 대신 장점에 더 집중하려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그 변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간 나를 짓눌렀던 무거운 감정들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사랑의 끝은 언제나 쓰라렸지만, 그 고통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 그 아픔들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사랑은 상처와 치유가 공존한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이제는 그들의 안녕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미정의 말을 빌리자면,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기를, 숙취로 고생하는 일이 없기를." 그들과 함께한 시간 덕분에 나는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이별의 아픔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의 또 다른 면을 마주할 수 있는 내가 되었기에, 스타벅스 역시 이별의 상징에서 벗어나 새로운 깨달음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커피를 마실 것이다. 이번엔 홀로가 아니라, 나와 함께 걸어가는 그와 함께. 미정과 구씨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추앙'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