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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 속도 Sep 24. 2020

재택 온보딩 : PO 편

뉴비지만 방향성을 제시해야 된다는 것, 그것도 재택 와중에!

그렇게 또다시 새로운 조직에서 PO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처음 얼마의 기간 동안 이런저런 걸 해야 된다 정리된 자료는 많지만 그걸 삶으로 가져오는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인 것입니다.

저는 몸으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회고하면서 아 그게 그거였구나, 깨닫곤 하는 사람으로 이번 온보딩의 경험도 주절주절 ver.으로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첫 주. 회사 문화 차원 그리고 팀의 로드맵 차원에서 괜찮은 온보딩 프로세스를 밟았다. 회사가 문화를 중시하고 어떻게 했는진 모르겠지만 호의적인 분위기를 잘 만들어놨다. 입사동기들과 같이 한 뭔갈 만드는 귀여운 세션도 그랬고 부서별로 질문을 받는 공개 슬랙 방이 있는 것도 그랬고 각 층마다 붙어있는 일하는 방식까지 아, 인사팀 애 많이 쓰네 싶은 요소가 구석구석에 있었다. 이 전 회사까지는 제공받지 못했던 소소한 만족을 주는 것들 -1. 산소발생기 2. 제빙기 3. 냉장고 4. 당일 휴가 5. 자율 출퇴근 6. 안마의자 7. 내 자리와 여분의 모니터들 네 슬프게도 이런 것들이 크게 만족스러웠습니다-덕에 생활이 쾌적했고 아 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 싶었다. 팀 온보딩도 첫출발은 좋았다. 빠른 파악을 장려하며 담당업무도 꽤나 체계적으로 인수받았다. 내가 지금껏 담당했던 것은 이 회사의 큰 그림으로 보았을 땐 이 부분이었구나(프로덕트 차원) 아 나는 장표에서 이런 걸 안 해봤구나 아 이쪽은 좀 더 해봐야겠다(스킬 셋) 의욕이 마구 솟구쳤다.

그러나 재미있는 큰 그림 얘기는 여기서 끝이며, 실무단으로 내려오죠? 눈 앞이 깜깜해집니다. 더 이상 주니어 때처럼 명확하게 과제가 쪼개져서 오지 않기 때문. 얼핏 문서화가 잘 돼있다고 느꼈던 부분은 관리가 이상적으로 잘 되는 건 아닌 상태인 데다, 각 부서별로 정리하는 방식이 다 다르다 보니 이내 '어느 문서를 어디서 찾아야 될지 모르겠다'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력 이직자에 바라는 점은 '너 할 줄 알잖아 해봐'인 것. 왜 이렇게 불안하고 힘에 부치나 곰곰이 따져봤더니, 나는 이 정도 사이즈의 리엔지니어 프로젝트를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코드레벨의 리팩터링이 아닌, 업무 프로세스 전체의 재정립을 의미한다. 저는 개발자가 아니니깐요.) 무에서 MVP를 창조하는 것도 해봤고, 기능을 추가하거나 버전업도 해보았지만 지금 투입되는 프로젝트는 하필 전사적으로 모든 시스템을 갈아엎는 프로젝트인 것이다. 얼핏 보니 1. 운영단계별로 시스템이 쪼개져 있고 2. 상품 카테고리별로도 시스템이 분화되어 있는데 이를 한데 모아야 해서(가로로, 세로로 모두 모아야 되는 상태) 사이즈도 방대하고 여기저기 문제가 얽혀있어 파악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As-Is 분석이라거나 히스토리 파악이라거나 명료히 되어있는 게 아니고(이제 해야 되니까!) 그렇다고 전임이랄 게 딱히 없는 신규 프로젝트. 게다가 legacy는 어마어마한. As-Is를 파악해나가면서 동시에 새로 나아갈 방향을 잡고 유관부서들과도 합을 맞춰야 했는데 그야말로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이 조직은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무엇을 바꾸고 싶어 하는가. 일을 진척하려면 미팅 어젠다를 세워야 되고, 그러려면 여기저기 물어야 되는데 사실 어젠다 세우는 역할로 들어온 게 나고(이미 OKR 설정이 완료되어 대외적으로 뫄뫄의 담당자는 이분이십니다, 공표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어설프게 물어봤자 그에 대한 대답은 '우리도 이제 하던 대로 말고 새로 짜야되서 잘 모르겠는데 너의 제안은 뭔데 한번 짜 봐'라.... 흠. 연차가 쌓여가면서 어렵다고 느꼈던 부분이 바로 '판단에 확신을 가지기'인데 오자마자 판단을 내려야 한다니. 과연 나는 1인분을 해 낼 수 있을까. 우울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일 수밖에 없으니 목표를 너무 크게 잡지 말고 하루에 한 다리 정도만 파악하기로. 코끼리가 존재하긴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이제 같이 코끼리를 만들어나가는 거 같은데? 지금 필요한 건 쏘아 올릴 작은 공 하나.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말자.

재택의 길 잃은 마음은 향초로 달래자

여기서 큰 변수는 재택. 사람을 파악하는 것도 온보딩에 중요한 과제인데,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파악하다가 모르겠는 걸 물어본다거나(그나마 질문이 뾰족해져야 할 수 있음), 회의에서 다른 사람의 반응을 살피며 아, 이런 분위기구나 파악하는 정도. 사무실에서는 옆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든지, 소위 징징거릴 수도 있는데 방구석에서 헤매며 문의사항을 정리하려니 좀 많이 외로웠다. 여기다 물어보면 되는 거 맞나? 너무 빈약하게 파악한 건 아닌가? 시간이 약이라고 한 달 여가 지나 연관 프로젝트의 킥오프 미팅이 열리고, 모든 미팅에 들어가서 방대한 문서를 훑으면서 희미하게나마 내용을 알게 되 이젠 '이거 모르겠으니 회의하자' 할 수 있게 되었다. 첫 회의에서 보스로부터의 피드백이 "아직 우리 제품을 잘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였는데,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되려 안도가 되었다. 네, 저는 지금 잘 모르겠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전 이거 말고도 저것도 잘 모르고 요것도 잘 모르겠어요! 의 마음으로 두어 번 질의 세션을 반복했다. 모른다는 걸 알고 인정하는 건 당혹스럽지만 그렇다, 그게 온보딩의 첫걸음입니다. 다들 신입 보고 뭘 좀 많이 물어보았으면 좋겠다고 그러잖아. 그렇지만 신입은 그러기 쉽지 않죠. 뭘 모르는 질 모르는걸! 겨우 어느 정도 파악되었다 싶었을 때 벌써 방향을 제시해야만 했다. 내가 우왕좌왕하는 동안 데드라인과 퀄리티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회사에서의 방향 제시란 혼자 할 수 없는 것으로, 일단 나와 관련자들이 생각하는 방향이 맞아야 하니 '지금까지 이렇게 파악되었고, 이런 방향으로 가려고 하고 대안과의 장단점은 이렇다' 수준으로 끊었다. 방향도 범위도 정해진 게 없으니 미흡하든 어떻든 시작을 하는 게 중요하니까.(다시 한번, 필요한 건 쏘아 올릴 작은 공 하나!) 

'허덕허덕 어떻게든 해낸다'로 달리다 보니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문서 정리였다. 방향도 범위도 설정되어있지 않아 나조차 생각이 중구난방인 상태인데 그걸 그린 문서는 얼마나 중구난방이었겠습니까. 당연히 피드백이 쏟아지고... 그래도 다행히(?) 방향이 잘못된 건 아니었던 모양. 수정 보완해가면서 다음 미팅을 어찌어찌 진행할 수 있었다. 그제야 유관부서와도 만나고. 이 즈음부터였나. 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해내기만 하면 레벨업 할 수 있을 것이란 강력한 예감이 든 것이. 연말 즈음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길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얼레벌레 온보딩을 해버린 것 같은데(연착륙 그것은 환상인 것입니다.) 그래, 삽을 떴으니 뭐라도 짓게 되겠지.


돌이켜보니 온보딩에 애를 먹은 건 꼭 재택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고 팀과 프로젝트의 색깔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헤쳐 모여 한 팀으로 세팅된 팀, 수년간 파편적으로 운영되던 시스템을 전사적으로 리엔지니어링하는 프로젝트, 명확히 방향을 설명해주기보다는 좋은 제안을 먼저 가져오길 바라는 보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요, 어디서나 우왕좌왕은 하게 돼있고 내가 1인분의 몫을 해내고 있구나 최초의 기분이 들 때까지는 괴롭다는 겁니다. 그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지만 이 시국에는 그러기가 난이도가 상당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이직하세요. 이 글을 이 시국에 온보딩 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을 뉴비들에게 바칩니다. 적응이 얼추 되면(혼자서 다음 어젠다를 설정하고 진행할 수 있게 되면) 발행하려고 한참 전부터 글을 쓰고 고치고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발행할 수 있게 되어 후련합니다.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아직 수습 통과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을 이직 때마다 늘 가지고 있습니다. 조직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아마도 잘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겠지요. 여기서의 마지막 즈음엔 무엇이 되어있을 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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