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다이어리에 미친 영향
지난 한 두 달, 유행처럼 번지는 '미라클 모닝' 운동에 동참했다. 새벽 시간에 일어나 자기 성장을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결심을 했지만 워낙 야행성 인간이었던지라 새벽에 몇 번이나 알람 소리와 싸우며 몸을 일으켰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가 아니라 '이번에는 진짜 한다'라고 다짐하며 일어나기를 며칠 했더니, 온종일 노곤해져 오히려 집중이 안 됐다.
'또다시 작심삼일이 되는가?' 하는 한심한 생각이 스멀거리며 올라오다가도 '이런 자각만으로도 꽤 진보한 것이다'라며 자신을 다독여본다. 나의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으니, 다시 에너지를 충전하고 시도하면 될 것이다.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는 것만으로도 칭찬해 주고 싶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획표와 일과표를 만들었다. 방학이나 연초에는 항상 넘치는 의욕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칸을 나누고, 색연필로 칠해가며 열심히 성장기의 통과의례를 수행했다.
방학이 끝나고 나서 계획표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학이 되기 며칠 전부터 급하게 밀린 일기를 쓰고 방학 숙제를 했던 기억만 남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다이어리와 플래너를 꾸미며 매년 새로운 속지를 채워 놓는다. 서점에 가면 문구 코너에서 한참을 서성 거리기도 하고, 커피전문점에서 이벤트로 나오는 다이어리를 받기 위해 평소에 좋아하지 않는 당분이 잔뜩 들어있는 음료를 마시기도 한다.
새해는 매년 이렇게 새 다이어리와 함께 시작됐다.
코로나-19는 일상뿐만이 아니라 다이어리도 바꿔놓았다. 전에는 업무 일정과 할 일 목록이 꽉 차 있었다면, 지금은 '돈 버는 일정' 말고, 오늘 뭐 하며 시간을 잘 보낼지 채워 넣은 다이어리가 되었다. 강제성과 마감 시간이 없는 일상의 시간표를 만드는 것이 처음에는 장난처럼 느껴졌다.
아침 기상부터 오전 오후에 해야 할 일, 주간 계획 정도까지만 만들었지만, 어차피 누가 검사할 사람도 없고 안 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 계획표였다.
그러나 습관은 어쩔 수 없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코로나 다이어리'는 할 일 목록이 길어졌고, 미뤄 놓았던 소소한 계획과 도전해 보고 싶었던 자격증 시험 날짜도 잡았다. ‘포스트잇’으로 당장 해야 할 일들을 눈에 띄게 붙여놓고 다 하고 나면 빨간 줄을 그었다. 어느새 코로나 이전 못지않게 일정이 빼곡해져 있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냥 편하게 노는 게 힘드나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묻는다. '아무것도 안 하면 편하세요?'
말장난 같지만 흔하게 듣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신과 옥신각신하며 1년이 지났고 연말이 되어 다이어리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참 많은 계획과 실천과 포기가 있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짧았던 것일까?'
'계획표 세우기 전과 달라진 것이 무엇일까?' 끝없는 질문으로 '연말정산'을 하고는 잠시 의기소침해졌다.
'정말 난 제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스스로 물어보며 다시 다이어리의 1월부터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다이어리 1월에는 인스타그램 초보자인 내가 있었다.
사진을 못 찍는다며 한탄했던 목소리와 어설프게 올린 피드가 증거물로 남아있다.
릴스와 스토리를 어떻게 하는지 두 번, 세 번 들으며 스트레스를 받았던 시간이 새삼스럽다.
지금은 친구와 선배들에게 인스타그램을 가르쳐 주는 입장이 되었으니 스스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 달 몇 권씩 읽었던 책 제목들도 반갑게 남아있고, 갑작스럽게 의뢰받았던 일을 하느라 두, 세 달 정신없이 준비하는 과정도 적혀있었다.
일기처럼 길게 쓰지는 않았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이 생생히 남아있었다.
물론, 하다가 만 일도 눈에 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멈춰버리거나 더 이상 효용이 없어 포기한 부분이다.
일기나 플래너는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다.
그 안에는 과거의 내 모습과 목소리가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고, 미래를 점 칠 수 없지만 지난 기록 속에서 오늘 나의 모습이 설명된다. 고로, 오늘 만드는 시간은 분명 미래의 어느 시점과 인과관계가 있을 것이다.
오전 내내 다이어리의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1년 동안 지나온 시간이 그렇게 헛발질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큰 결과물, 즉 돈으로 환산되는 성과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실패한 계획표로 생각한 자신이 반성된다.
성인이 된 나에게 일일이 칭찬해 주는 어른은 이제 없다. 용기를 주며 좀 더 해보라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도 없다. 이미 내 안의 목소리가 그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힘을 주는 목소리가 있다.
갑작스러운 코로나 휴직 후, 새로 꾸민 다이어리는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 만들었던 계획표가 아닌, 여유로움으로 시간을 조망해 보며 실천할 수 있는 계획이 들어있다
오늘도 나의 다이어리는 채워지고, 형광펜과 스티커로 꾸며진다.
종이 위에 그려 넣는 나의 인생 지도다. 코로나 상황이 진정되고 일상으로 회복이 되어도 변화된 다이어리는 여전할 것이다.
옛 어른들은 '인생사 새옹지마(人生事塞翁之馬)'라고 했다. 세상만사는 변화가 많아 어느 것이 화가 되고, 어느 것이 복이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긴 호흡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수없이 떠오르는 선택과 결정의 상황에서 잠시 멈추고 '마음의 여백'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