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원 작가님의 퍼스트 오더 연재!
마음이 견디기 힘들 만큼 아팠다. 처음으로 아이를 놓고 집을 나섰다. 태윤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태린이를 어떻게든 데리고 나갔으니까. 남해 바다로 훌쩍 떠날 날을 꿈꿔오긴 했다지만 외박을 이렇게 빨리 할 줄 몰랐다. 이왕 나선 김에 혼자 있을 장소를 찾아서 펑펑 울 요량이었다. 엄마가 없다고 불안감이 생길지언정 내 감정 상태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떠나 왔지만 새끼들이 눈앞에 걸렸다. 아이들 사진을 보다가 지하철 열차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울음이 터졌다. 눈과 배에 힘을 꽉 주고 참고 또 참았다. 지금은 아픈 내 마음에 충실하자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들에게 환하게 웃어주려면 나 먼저 살려야 했다.
줄곧 바다로 도망치고 싶었다. 넓은 바다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것 같았고, 막막한 마음에 바다가 답을 줄 것만 같았다. 나를 지켜내고 싶었다. 어디라도 가서 정성스럽게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연고도 발라주고 싶었다. 이미 살이 돼버려 더는 느껴지지도 않는 지난 상처들을 굳이 꺼내서 어떻게 아물었는지도 살펴주고 싶었다. 나에게 묻고 싶었다. 어떻게 할 거냐고. 절망스럽게도, 답을 찾으러 갈 수 없었다. 바다는커녕 산도, 가까운 한강도 가지 못했다. 지독한 현실이었다. 밥맛이 없다는 이유로 며칠 굶다시피 한 터라 어디를 돌아다닐 체력도 없었다. 낯선 곳일지라도 주저앉아 쉬고 싶었다. 체력이 정신력을 따라가지 못했던 거다. 비어 있는 동생 집에 가서 누웠다. 일단 잠부터 잔 후에 갈 곳을 정해 보기로 했다.
남편은 내가 꿈꾸는 크고 작은 일들을 탐탁히 여긴 적이 없었다. 남편에게는 욕심이지만 나에게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시간이 뺏기는 일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결혼한 지 수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나를 몰라준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럴 때면 흔쾌히 내어준 자유부인 시간도 기억에서 씻은 듯 지워졌다. 남편한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인생을 개척할 궁리를 해야 했다.
내가 없으니 남편은 아이 둘 모두 씻기고 먹여야 한다. 간간히 설거지도 하고 청소기도 돌려야 한다. 아이들이 투닥거릴 때는 달려가 중재도 해야 한다. 아내가 갑자기 가출하는 바람에 주말 강의도 모두 취소해야 했고, 회사에 일찍 출근할 수도 없게 됐다. 아이들은 엄마를 찾을 것이다. 엄마가 없으면 밥도 잘 안 먹을 테니 당황스러울 테고. 남편은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시간 속에 감사함이라는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행복한 줄 모르는 사람이다.”
아내가 며칠 집을 비우면 남편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했던 말을 이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행복할 날을 위해 우리 가족 모두 비싼 비용을 치르고 있었다.
그 사이, 나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길을 잃은 양은 울타리를 찾을 뿐이었다. 거친 시멘트 바닥을 걸을 때 푹신푹신한 수풀을 깔아주는 사람이 되기를, 가끔 햇살도 두려운 내게 그늘이 되어주기를, 아슬아슬하게 서 있을 때 든든한 받침대가 되어주기를, 돌아볼 여유도 없을때 밝은 햇살로 이끌어주기를, 마음이 가쁜 나를 위해 깜빡이를 켜고길 모퉁이에서 기다려주기를. 왜냐하면 나는 극도로 외로운 사람이니까. 당신이 옆에 없을 때는 더더욱. 결혼해서 보니 아이 아빠와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간단한 퍼즐 조각 하나 들어맞지 않는 사이였다. 소소한 생활습관이나 가정 배경 따위를 사랑이 이겨내지 못했다. 대화를 할 때마다 우리는 평행선을 달렸다.
아침부터 이곳저곳 검색해봤지만 범위만 넓혀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무리해서 강화도라도 갈까 했지만, 숙소를 어디에 잡아야 할지 결정을 못 내렸다. 그러다 갑자기 파주에 있는 ‘지혜의 숲’이 떠올랐다. 왜 이제 생각이 났을까. 바다를 못 가더라도 책이라면 해답을 주지 않을까 싶었다.
지혜의 숲 섹션 3은 24시간 연중무휴로 운영되고 있다. 사방에 책으로 둘러싸인 도서관에 앉아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감정을 내려놓았다. 늦은 밤인데도 자리가 거의 찼다. 양해를 구하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북스테이 ‘지지향’ 로비이기도 한 이곳에는 묵는 사람들이 수시로 오르내리며 책을 읽었다. 북스테이를 하고 싶었지만 막상 돈을 쓰지 못했다. 혼자 머물고 싶다던 작은 소망을 이룬 것만으로 충분했다. 새벽에 그렇게 추울 줄 알았다면, 잠이 중간에 쏟아질 줄 알았다면, 잘 곳을 어디라도 정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 있으니 울분을 토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자신을 다독일 시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도서관에서는 책만 읽도록 독려하고 있어서 노트북은 가방에 다시 넣었다. 전자 기기를 충전할 플러그 하나 없기도 했다. 같은 공간에 있는 조형 작품을 구경하며 책장을 서성이다 한 권을 골라 앉았다. 시집 《당신에게로 가는 마음》 (변정현 지음, 2006)은 기다렸다는 듯 제대로 내 마음을 자극했다. 하나하나 정독하고 음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시집 전체가 내 마음이었다. 시인이 고등학생 때 쓴 시라니! 책장을 넘길 때마다 눈물을 뽑는 문구가 있었다.
내가 한동안
가장 두려워했던 하나는
당신이 나를 미워하면 어쩌나에서 오는
생각만으로도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 ‘나의 두려움’ 중에서
언제나 오리까.
또다시 나는 익숙한 소망에 당신을 비춥니다.
그에 갈대처럼 연한 내 믿음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맙니다.
– ‘가슴앓이’ 중에서
하얀 종이배 만들어 타고
거친 항해를 나섬에도
끝내 부서지지 않는,
그리움은
물 위에 지은 작디 작은 모래성
– ‘그리움이라는 것은’ 중에서
시 구절에서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내 마음도 남편 마음도 보였다. 눈물이 나고 남편한테 애잔한 마음이 생기는 걸 보니 나 역시 그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싶었다. 시집 ‘가슴앓이’ 마지막 구절이 나를 바르게 이끌었다.
허나 오늘 밤엔 조용히 잠을 청해 봅니다.
마치 주의 따사로운 손길처럼
등을 문지르던 달빛을 기억하며
당신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끝 모르는 이 길을 함께 걸으렵니다.
가족들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싶은 나지만 남편과 예쁘게 나란히 걷는 모습 또한 항상 마음속에 그리고 있다는 속마음을 깨달았다. 무섭게 다른 우리지만 언젠가는 어여쁜 하나가 되리라 믿고 싶어졌다.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는 새벽, 책을 읽고 생각하다, 읽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일기를 썼다. ‘같이’라는 표현도 어느 순간 고통이 돼버린 갑갑한 상황. 어떻게 현명하게 극복해낼지 밤새 책을 통해 어려운 답들을 풀어갔다. 우리가 첫 마음을 잊어버린 것뿐이면 용기를 내볼 참이었다.
오늘의 연재는 여기까지.
이후의 이야기는 책에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