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원 작가님의 퍼스트 오더 연재!
뒷주머니가 조금 차고 아이가 아프지 않으면 미술관부터 찾았다. 직장인 시절에는 미술관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미련하게 앞만 달리던 나날이었으니까. 일을 그만두고 나니,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이 마냥 소중해졌다. 그렇다고 예술을 깊게 아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내 안에 있는 감각을 되살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감성이 바짝 메말라버렸다. 생각까지 말라가는 내 모습이 슬펐다. 처음에는 나의 감성 세포들을 살리기 위해서 미술관을 찾았다. 어디든 나가야 직성이 풀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태린이와 같이 가고 싶어 전시장을 찾는다. 제 나름대로 즐기는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큼 값지다.
2016년 겨울, 우리 모녀는 올라퍼 엘리아슨의 <세상의 모든 가능성> 전시로 미술관 산책을 시작했다. 태린이는 늘 그랬듯이 앞서 걸어 나갔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오르는 모습에 손을 자연스럽게 뻗었고, 이끼 냄새를 맡아보려고 허리를 굽혔다. 천장에 매달린 기형 모형을 세모라고, 빙글빙글 돌아 내려오는 원반을 동그라미라며 손가락 그림을 그렸다. 잘 데리고 왔구나 싶었다. 가이드 라인을 잘 지켜서 마음껏 다니라고 풀어 두었다. 몇 바퀴 신나게 돌다가도 멈춰 서서 여러 차례 바라보는 작품이 생겼다. ‘뒤집힌 폭포’가 그랬다. 거꾸로 흐르는 물줄기가 아이 눈에도 신기했나 보다. 지나가던 외국인 중년 부부가 태린이를 관찰하더니 물었다.
“몇 살이죠? 이렇게 빠져드는 모습이 신기하네요.”
‘무지개 집합’도 태린이가 반했던 작품이었다. 이슬비 같은 물방울이 천장에서 떨어졌고, 그 물방울이 아래 조명에 비쳐 무지개를 만들었다. 아이는 무지개를 발견하기보다 이슬 안팎을 왔다 갔다 하며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느라, 나중에는 우산을 쓰고 빗속을 뚫고 다니느라 바빴다. 이 전시를 다시 봤을 때는 이슬 밖으로 원을 크게 돌며 공간을 느꼈다. 처음과 다르게 노는 아이. 아이가 즐길수록 올라퍼가 어찌하여 세상을 바꾸는 작가로 인정받았는지 공감할 수 있었다. 모든 가능성을 아이에게도 열어주었으니 말이다
어떤 전시든 아이를 따라 한 시간 정도 관람하고 나면 무엇을 좋아하는지 한눈에 보였다. <프랑스 국립 오르세 미술관 전: 19세기 미학의 세계>(2017. 3)에서 태린이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사실주의 작품 앞에서만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는 자기만의 언어로 나에게 말했다. 그 말이 프랑스어처럼 들리든, 일본어처럼 들리든, 깐따라삐아어로 들리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좀처럼 말하지 않던 아이가 느낌을 표현해주어 고맙기만 했다.
미디어아트는 태린이가 좋아하는 장르다.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놀다가 우연히 만났던, <모네 빛을 그리다 인트로 전>(2016. 5). 어두워서 무서울 법도 한데 한 걸음씩 내딛으며 빛을 밟았다. 눈에 비친 세상이 다채로웠는지 규모가 작았던 전시장을 1시간 동안 왔다 갔다 했다. 스크린 속 색채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바라보던 딸을 본 이후로는 미디어아트 전시를 줄곧 챙겨 본다.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더 퀸즈 시크릿 전 여왕의 정원>(2017.7)에서는 빛이 다채롭게 연출된 작품을 감상했다. 채광이 주는 빛줄기도 보여주려고 백남준 작가의 ‘다다익선’을 보러 과천으로 갔다. 거대한 텔레비전 물체와 유리 천장을 뚫고 쏟아지는 빛이 어떤 조화를 이루는지 위층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신나게 뛰어올라가면서 느끼지 않았을까.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 스스로 즐기고 있었다. 아이의 총명한 눈빛과 몸짓을 간직하고 싶어 적당한 거리에서 부지런히 따라 걸었다.
미술관은 대체로 공간이 트여 있고 천장도 높아 답답하지 않다. 국립현대미술관 MMCA 과천관은 아이가 뛰어다녀도 티가 나지 않는 곳이다. 밖으로 나와 넓게 깔린 잔디와 조각품, 솟아나는 분수를 보여주면 1석 2조. 날씨 좋은 날에는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야외도 좋다. 전쟁기념관 앞에 있는 용산가족공원은 소풍 기분까지 더해준다. 태린이는 전쟁기념관에서 늘 마라톤을 한다. 건물 내부에는 커다란 비행기와 탱크가 여러 대 있을 정도로 공간이 넓다. 사람도 많이 없어서 마음껏 뛰어도 잃어버릴 걱정이 없다. 전시 보러 가서 작품만 보여주면 아이가 지루해했을지도 모른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마음껏 뛸 공간이 같이 있어야 태린이는 엄마한테1 0점 만점에 10점을 주었다.
미술관 산책을 즐기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 태린이는 미술 놀이를 좋아한다. 볼펜 하나만 있어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낸다. 웬만해선 말을 하지 않는 아이가 커다란 전지 한 장을 바닥에 깔아주면 손바닥 발바닥까지 물감을 찍어 바르며 거침없이 표현을 했다. 미술적 영감을 받도록 지렛대 역할을 해주고 싶었다. 놀랍게도 미술관에 다녀오면 그림에 변화가 생겼다.
<그대 나의 뮤즈 반 고흐 to마티스 전>(2018. 1)을 본 뒤에는 붓에 물감을 잔뜩 찍더니 손목 스냅을 이용해 동그랗게 흔적을 남겼다. 내 딸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마치 앙리 마티스가 우리 집에 온 것처럼 도화지에 거침없는 습작을 남기기도 했다. 미술관에 다녀오면 태린이는 꼭 마법에 걸렸다. 하루하루 전문가처럼 그리는 아이 모습에 미국의 세계적인 추상주의 화가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의 이름을 따서 ‘태린 폴록’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주변 예술가 지인들은 태린이가 보통 영감을 가진 아이가 아니라며 미술학원 같은 곳에 절대로 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기도 한다. 아이의 미래가 앞으로 어떠할지 부모인 나도 모를 일이지만 영광스러운 감상평이었다.
미술관 산책이 언제나 순조롭지는 않았다. 여름 방학이 시작된 날, 아들을 남편한테 맡기고 둘이 집을 나섰다. 누가 봐도 아이 취향 저격이었던 전시, <오! 에르베 튈레의 색색깔깔 전> 이었다. 색깔이라면 흥분해서 세상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말하는 아이가 전시장에 들어섰는데도 시큰둥했다. 온통 빨강, 파랑, 노랑이 애교스럽게 깔려 누가 봐도 좋아해야 마땅할 전시였다. 더더구나 유모차에서 안 내리겠다니! 배신 당한 기분이었다. 세 살 때는 유모차에 안 타고 걸어 다니겠다고 난리더니 네 살 되더니 달라진 걸까. 유모차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오늘의 연재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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