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파혼'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생소한 감정의 파도를 이겨내는 과정이었다. 거세게 부딪혀오는 물살에 쓸려가지 않도록 버텨내고, 나의 붕괴된 세상에서도 꿋꿋이 살아가기 위해서. 파도에 쓸려온 혹은 쓸려간 잔해들을 사이에서 내가 잃어버린 건 무엇인지 파악해야 했고,버려야 할 것과 그나마 쓸만한 것들을 골라내어 무너진 집을 어떻게 다시 세워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파혼'은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그 후에 홀로감당해야 하는 시간들이 '진짜 파혼'이었다.
파혼 후에 한 동안은 상실감에 대하여 생각하며 지냈다. 큰 나무를 뽑아낸 자리처럼, 깊은 곳까지 파내어진 마음의 구덩이에는 공허뿐인데, 대체이 비어버린자리에는 무엇이 심겨 있었기에 이토록 커다란 흔적이 남은 걸까. 영원히 함께할 거란 '내것'이라 믿으며 쏟아부었던 애정은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지고ㅡ 나의 모든 것들이 부정당한 느낌과 지독한 허탈함만이 가득 고여있었다. 구덩이에 가득 찬 상실감을 가만히, 그리고 고요히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갔다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정말 내 손에 쥐어진 적이 있었던가?
떠나거나 사라졌다면 애초 그건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원래 당신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잃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멈추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정말로 당신의 것이었다면 떠나지도 않고 잃어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 건 바로, 당신 자신이다.
『법화경 마음공부』
서른네 살, 소위 '괜찮은 결혼'을 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욕심을 부렸다. 나를 깎아내서라도 그와 결혼으로 묶이려고 했었다. 아마 그렇게라도 기혼자라는 사회의 주류 집단에 편입되고, '시집 잘 갔다'라는 얘기라도 들으면 인생의 성취라도 이룬 냥, 뿌듯할 것 같았나 보다. 내게 남은 상실감의 크기는 곧 나의 욕망의 크기였다. 뿌리가 깊었던 만큼 욕심이 뽑혀 나간 구덩이는 크고 깊었다. 나는 나에게 '괜찮아 보이는 결혼'을 선사해 줄 그 사람을 욕심냈던 거 같다. 가지려고 손을 뻗었는데 눈앞에서 사라지니 마치 빼앗긴 기분이 들어 억울했었다.
파혼 직후에는 그를 원망했었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더니 어떻게 그렇게 쉽게 돌아설 수 있는지, 사랑이 어떻게 그러냐며 분개했다. 하지만 그를 걷어내고 잔잔해진 마음을 바라보면, 금방 명확해진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의 사랑도 썩 대단치 않았지만,적어도 내가 그를 사랑했던 만큼만이라도 그가 나를 사랑했다면, 나를 그렇게 쉬이 대하지는 못했을 거다. 제멋대로 사랑을 가늠해두고, 왜 이 정도밖에 안되냐는 원망은얼마나 이기적이었던가. 달콤했던 약속들이 지켜질 수 있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그의 신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닌 것까지 내 뜻대로 하려는 오만과 편협이었다. 내 욕심이 너무 커서, 관계란 내가 투자한 만큼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느 날엔 그를 떠올리다가 그가 불쌍해서 울었다. 나를 생각할 때도 좀처럼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었는데 그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그는 체면을 아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모습이 그의 자존심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의 그 꼿꼿함이 좋았었다. 하지만 그 너머에 있던, 그가 강한 자존심으로 무장시켜야 했던 그의 결핍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가 모질게 나를 밀어낼 결심을 하기까지 얼마나 상처를 받았던 걸까. 모두가 자기 인생이 가장 애틋하고 행복하길 바라니까. 그도 그의 인생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했던 것뿐이었다. 나에게 매정하게 대하던 순간에 그의 열등감을 알아차렸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질책의 말 대신에 미안하다며 안아줄 걸. 그의 모순을 파악하고 요령 좋게 받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의 눈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내 생각에 사로잡혀 진정으로 상대방의 입장에 설 수 없었구나. 나는 헤어지고 나서야 오히려 그를 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교만한 생각일 수 있지만, 파혼당한 주제에도 나는 그가 외롭게 살지 않을까 염려된다. 결혼에 대한 열망과 환상이 있던 그는, 맞출 필요도 없이 모든 가치관이 완벽하게 같길 원했었다. 그는 내가 아니어도 자기에게 딱 들어맞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 자신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둘이 되지 않는 이상, 현실에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또, 그가 원하는 모양대로 깎여질 사람을 만난다 해도, 본인만의 견고함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그가 기댈 수 없을 테니 외로울 거다. 어쩌면 그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기꺼이 자신을 깎아내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 그가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관용을 다른 사람에게는 열어둔다고 생각하면 씁쓸하지만, 그래도 그가 언젠가는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도 알 수 있을 테니.
모쪼록 우리의 이별이 그에게 가장 좋은 결정이었기를 바란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죄책감사이쯤 어딘가에 어중간하게 있던 마음에 대해서도 그저 편안하게 두고 보기로 했다. 최근에 동네 피부과에서 '점 제거 개당 1000원' 이벤트를 하기에 이 참에 몸에 있는 큰 점까지 싹 다 빼버리겠다 했더니 엄마는 대번 심각하게 걱정부터 쏟아내셨다. 점 뺄 때 아플 텐데? 점 빼고 나면 물 닿으면 안 된다는데 어떻게 해? 한 번에 안 빠지면 여러 번 해야 된다는데 어떻게 하려고? ㅡ 무슨 큰 수술이라도 앞둔 것처럼 걱정을 하는 엄마가 황당했다. 애초에 마취크림을 바르니 그리 못 견딜 아픔도 아니거니와, 물에 닿지 않도록 방수 반창고를 붙이고, 한 번에 제거가 안된다면 여러 번 하면 되는 일이다. 정 안되면 이 점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구나, 하고 그냥 살아도 그만이다. 그저 내 문제라면 사소한 일까지도 대수롭게 여기는 건, 엄마가 엄마이기 때문이겠지. 엄마가 습관적으로 하는 걱정에 내가 일일이 책임감을 느낄 수는 없겠다 싶다. 그래서 '이제 네 나이에 그 정도 혼처는 끝났다'며 모질게 말하던 엄마에 대한 원망과, 나의 파혼으로 부모님에게까지 상처를 드렸다는 죄책감에서도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물론 '혼기를 놓쳐서 미혼으로 사는 인생'과 '점 제거 시술 후 후유증'은 무게감이 다르긴 하겠지만, 자식 걱정하는 건 그냥 엄마의 일로 두기로. 매일 뜨고 지는 것은 태양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그냥 뜨면 떴나 보다, 지면 졌나 보다, 하기로 했다.
실제로 점 제거 시술은 생각보다는 아팠지만, 역시 참을 만했다. 이제 나는 내 몸에 뚫린 구멍들을 돌본다. 얼굴에 있는 점을 뺀 자리는 금방 아물었는데, 몸에 있던 큰 점을 뺀 자리는 유독 낫지 않고 진물이 일주일 넘게 올라오고 있다. 드레싱에 진물이 가득 차면, 새 방수 반창고를 상처 크기에 맞게 잘라서 갈아준다. 반창고 접착제에 알레르기가 생기기도 했지만, 아물어가고 있으니 언젠가는 나을 거다. 파혼도 내 마음에 큰 구멍을 남겼다. 크고 깊었던 만큼 오래도록 진물이 나오겠지만, 덧나지 않게 돌보다 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새 살이 올라올 거다.
아직도 종종 예상 못한 순간에 튀어나오는 기억과 감정의 잔여물을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가끔 그가 없어서 더욱 안정적인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는 기회로 삼았으니, 파혼의 경험이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여겨진다. 한 바탕 재해가 지나간 후, 나의 집은 완전히 무너졌다. 대충 갈무리해두고 살아보려다가 깔려 죽을 뻔하고 나서는 제대로 설계도를 그려보고 있다. 다시 지어지고 있는 집은 전보다 더욱 견고할 것이다. 새 집에는 어떤 색의 지붕을 올리면 예쁠까 하는 기대도 있다. 나는 내 삶을 소소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다채롭게 채우고 싶다. 누구와 함께 하지 않더라도 혼자서도 충만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내 옆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며는, 나를 재단하여 본인의 인생에 나를 끼워 맞추지 않고,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서로 응원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상상도 해본다.
파혼 따위에 흔들리지 않을 거고 너 따위는 흔적도 없이 잊을 거라던 건, 내가 나에게 했던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리 괜찮지 않았고, 없던 것으로 하기엔 내 인생에 꽤나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빨리 잊어버리고 없던 일로 해보려고 무리하다가 스스로를 망치는 실수도 했었다. 앞으로도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지는 못할 것이다. 또다시 상처 입을 것이 두려워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 주저하게 될 것이고, 용기 내서 시작하더라도 사랑한다는 말 뒤에 언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예기 불안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했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빛나는 상흔이 될 거다.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해 사과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해보고 싶다. 그리하여 지금 당장은 그리 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진정한 평온을 찾길. 봄이 가기 전에 시들어버리는 꽃처럼 또다시 사랑은 채 피우기도 전에 사라지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살아갈 것이고 또 새로운 계절을 맞이 할 것이므로.
인생의 가치관 재정립 기간을 맞이하여 '나'에 대해서 깊이 탐구해보고 있다. 나를 '나'로 특정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일까?MBTI? 사회적 위치? 입에 물고 태어난 수저? 내 옆에 있는 사람? 무엇도 고유한 '나'를 전부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나름의 고민 끝에,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나'라는 단 하나뿐인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의 선택, 그리하여 만들어진 나의 경험, 그리고 그 속에서 했던 생각들이 켜켜이 쌓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것들이 뒤섞인 우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양도 크기도 깊이도 조금씩 다르지만, 사람들은 매일을 살아내면서 각자의 우주를 키워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환희에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에도, 다시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에도, 영원했으면 바라게 되는 기쁨에도, 시간은 절대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간다. 더딤 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내게 허락된 시간이어디에서 끝날 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인 기대수명까지 산다고 치면 대략 중간쯤에 있다고 생각된다.인생이 사계라면 한 여름, 24시간이라면 정오를 지나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길에 돌멩이 하나 있다 한들,물살이 잠시 갈라질 지언 정 물은 계속 그 방향으로 흐른다. 인생은 그렇게 계속된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지면 해가 뜨는 것처럼.
어릴 적 미술시간에 장래희망 그리기를 하는 것처럼, 서른네 살의 어른이도 나의 미래를 그림으로 그려보려 한다. 어차피 미래는 누구에게나 알 수 없으니,그저 기원하는 마음으로.타는 듯 아름다운 노을에도 꽃길이 펼쳐지길 기원하며 캐모마일 꽃밭을 가득 그리겠다.캐모마일의 꽃말은 '역경 속의 힘 Energy of adversity'.살다 보면 또 다른 역경도 있겠지만, 아름답게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 꽃길 옆에서 나와 함께 춤을 춰줄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 춤을 추는 동안에는 분명 즐겁고 행복하겠지만영원하길 기대하지는 않는다. 해는 언젠가 질 거고, 꽃길은 끝이 나고, 맨발로 춤추던 평야 끝에는 별안간 끝도 모르는 절벽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절벽 밑에는 내가 본 적도 없는 환상적인 해변가가 펼쳐져 있을 거라고 상상해본다. 해가 지면 하루가 끝날 것 같지만 그다음에는 달이 뜰 테니까. 그것도 크고 아름다운 달이. 그러니, 절벽에서 떨어졌더라도, 멋진 파도의 소리를 들어보며 아름다운 모래사장을 거니는 미래를 그려본다.
삶은 계속된다.
생각보다 마지막은 그리 쉽게 오지 않고, 삶은 계속된단다. 고난도 계속되지만 그만큼의 행복도 계속되니, 너무 힘이 들 때는 그냥 지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며 버티고, 기쁠 때는 언제 끝날까 두려워 말고 충분히 즐기면 돼. 슬프기는 해도 두려운 일은 아니니, 언제든 다시 일어날 준비가 되면 또 씩씩하고 즐겁게 살아보자.나는 힘이 들 때마다 누구라도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길 바랐다.하지만누구도 없는 것 같다면, 기약 없는 기다림은 당장에 멈추고, 스스로에게 계속 말해줘야 한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그리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이 글을 봐주는 분들에게도 꼭 전하고 싶다. 내가 나에게 말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계속되는 삶을 응원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