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망한 탈출 대작전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by 모험소녀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정신 차려 보니 벌써 내 나이 스물 여덟.


여전히 업무에 쫓기듯 살며 정체성은 찾지 못했고,

대장님과의 끊임없는 감정 노동에 지쳐 표정을 잃은 채 메마른 대답만 이어갔으며,

사랑의 좌절과 마음 고생까지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거기에 본사 복귀마저 좌절되자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이미 이성은 잠들어버리고, 좋은 것보다 나쁜 것만 보게 되면서 감정만 살아나게 된다.


나의 20대를 러시아 촌구석에서 계속 우울하게 보낼 순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세게 내리다. 이렇게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니 언젠가 한 번 지나가 꺼져버린 줄 알았던 이직에 대한 불씨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이야. 올해 아니면 안 돼!


다른 회사 신입으로 가기에는 올해가 마지노선이 될 것 같아 나는 폭주하는 탈출 열차 위에 올랐다.

멀리 파견을 나와 있는지라 물리적인 거리가 있었지만,

다행히도 부지런히 TOEIC 점수를 따놓은 것이 있어 채용 공고만 나면 지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어리석었던 것 같긴 한데,

그 때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방송국 또는 대기업이었다.

당시 내 수를 잘 몰랐고 다소 즉흥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물론 주변 사람들에겐 거의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미 가득 찬 나의 탈출 에너지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몇 차례 지원한 적 있는 대기업에 재차 원서를 넣기 위해 며칠 내내 나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 자기소개서를 써내려갔다. 그렇게 나를 깊이 알아가는 과정은 처음 회사 들어갈 때도, 들어와서도 해본 적 없었다.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스물 셋 이후 멈춰버린 나의 시계를 다시 켠 기분랄까.


덕분에 1차 면접 통보를 받게 됐고, 이틀 정도 휴가를 내고 서울에 왔다.

무서울 게 없었다. 두려운 마음이 생길 때면 '안 돼도 다시 돌아가면 그만'이란 맘으로 잠시 지금의 직장을 방패 삼았더니 떨리지는 않았다.

나에게 이렇게 당당한(?) 모습이 있었는지 회사 안에서는 쪼그라들어있어 잘 몰랐다. 소심하고 말수 없던 나였는데, 한마디한마디 자신있게 면접을 보고 있었다. 성장한 모습을 스스로 확인하니 새삼 놀라웠다.


거기서 난 가능성을 봤고, 이후 인적성 검사와 2차 면접까지 이루어졌다. 별 얘기 없이 며칠씩 연달아 휴가를 내는 나를 보고 대장님이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신랑감 만나러 서울행 하는 거겠거니 하셨을지도.


2차 면접에서는 같은 학교 후배를 만나 서로 당황했지만, 반갑게 인사하 나중에 회사에서 보게 되면 좋겠다며 헤어졌다. 후배는 의아했을 거다. '회사 잘 다니고 있는 선배가 도대체 여기 왜 온 걸까?'


아무튼 최종 결과만 기다리면 되는 거였다.

지금까지 첫 회사 외엔 최종까지 와본 적도 없었고, 면접도 나쁘지 않게 봤기 때문에 내심 기대가 됐다.


그리고 급한 마음에 무리수를 던지고 만다.

아직 발표도 안 났는데 대장님께 그만두겠다고 선언을 해버린 거다!

합격에 대한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회사에 계속 남을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정을 들으신 대장님은 노발대발할 거란 예상과는 달리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다.


"내가 보기엔 지금 서과장이 젊은 혈기에 중심을 못잡은 모습인 것 같은데..."


그러시고는 최종 발표가 나면 그때 그만두라고 일단 잡아두셨다. 솔직히 비밀을 지켜주고 지혜롭게 대처하신 대장님께 놀랐다. 그래도 선전 포고를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했고, 대장님도 나에게 조심스러운 눈치셨다.


하지만...

나는 최종 낙방하여 탈출 대작전은 패했고,

결국 회사에 남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동시에 본사 복귀 발령을 받았다.

이런 기막힌 타이밍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민망했다.


그렇게 대장님과 나만 알고 지나간 대형 해프닝으로 끝나버렸지만,

당시 탈출 과정 하나하나가 나를 알아가는 큰 배움이고 의미였기 때문에 후회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때 나를 잡아 둔 대장님이 고맙기도 밉기도 하지만,

덕분에 나는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홀가분하게 본사로 복귀했으나, 나를 기다린 건...?



Point7. 나의 발전 정도를 확인해 보자!

사회 생활 4~5년차쯤 되면 조금씩 현실 자각의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 후배들은 많아지고 업무 연차는 늘어만 가는데,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별로 없고 거창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업무를 잘 모른다고 하기엔 신입과는 거리가 멀어 부끄럽고, 상사에게 들고간 자료들은 늘 반려되기 일쑤. 매일 같은 일과 실수를 반복하며 발전 없이 허덕거리는 것 같아 자신이 초라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내 성급함에서 나온 생각일 것이다. 본래 동일한 환경, 같은 사람들 울타리 안에만 있으면 자기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 따라서 주변을 환기시켜 새로운 업무나 사람들 속에서 자기 강점과 약점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굳이 나처럼 다른 회사 입사 시험장에 가서 확인하지 않고도 사내에서 그런 기회를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해 직접 부딪혀 볼 수도 있겠지만 부담이 된다면, 사내 다른 활동을 활용하는 것도 좋겠다. 예를 들어, 동아리나 스터디 모임에서 업무 관련 주제나 자신 있는 아젠다를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캐주얼하게 서로 의견을 나누는 건 어떨까. 자기가 주제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 등 발표 준비하며 자연스레 스스로의 역량을 점검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또 사람들과의 소통 과정에서 문제 대처 능력도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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