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 마중 나온 부모님이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지인들 일화를 여러 번 들은 바 있다.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곳
초콜릿, 과자, 치즈, 온갖 유제품...
러시아는 여성들에겐 천국 같은 곳이다. 진한 단 맛의 초콜릿, 저렴하고 다양한 치즈, 그리고 지방 함유량이 높은 요구르트와 우유, 달달한 유제품 간식, 설탕 듬뿍 과자까지!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 종류별로 먹어보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살집에 옷은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거기에 유학생 본성에 충실해 남은 음식은 늘 바리바리 싸오니,
이건 스스로 먹는 걸 조절하지 않으면 100% 증량이다.
너무나 맛있는 막대빵, 바똔이다. 팔뚝보다 굵은 크기.
'바똔(батон)'이라는 러시아 서민 빵이 있다.
바게트처럼 길쭉한데 그보단 두툼하고 부드러운 빵으로, 이게 참 부드럽고 고소해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너무 맛나서 한때는 점심 먹기 애매할 때 바똔 절반을 뚝 잘라 학교에 싸가서 배를 채우곤하였건만,
그게 그렇게 살이 찐다는 것이다...! 탄수화물 덩어리니 실제로 증량에도 한 몫 했다.
"오늘은 바똔 반 조각을 점심으로 때우며 지겹게 수업도 들으며 수업 네 개를 넘겼다."
- 2004.4.6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그렇게 교환학생 초반에는 아무 생각없이 맛있게 다 잘 먹었다.
친구들과 손님놀이도 잦았고, 어디 나가면 식료품점 가서 장보는게 낙이었다.
운동은 안 한 상태로 한 달, 두 달 먹기만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너 살찐 것 같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듣게 되었다.
"아저씨부터 시작했다. 나 살찐 것 같다고. 그래도 아침이어서, 얼굴이 좀 부어서 그런 거겠지..하고 그냥 넘기려고 무지 노력 많이 했는데 ...(중략)... 나오는 길에 또 한 번, 모임 가는 길에 다른 사람에게 또 한 번 살.찐.것.같.다.! 그러려니 하려 했는데 점심식사 후 다시 한 번...! 총 네 번을 들었다."
- 2004.7.4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마침 체중계 있는 집에 가서 몸무게를 재보니.... 충.격.
그제서야 나도 나중에 귀국할 때 공항에서 부모님이 못 알아볼 수도 있겠구나 싶어졌다.
러시아는 유제품의 천국
더 이상은 안 돼!
그때부터 기숙사 친구들과 운동 모임을 결성했다.
한국에서 챙겨온 줄넘기로 몇 명이 기숙사 입구 앞 공터에서 뜀박질을 시작했다. 처음은 줄넘기 100개, 매일 10개씩 숫자를 늘려갔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줄넘기하는 우리가 신기한듯 쳐다보거나 놀리는 투로 말을 걸어왔는데,
굴하지 않고 차례를 정해서 뛰고 또 뛰었다.
"친구들과 함께 내 줄넘기 갖고 나가서 500개씩 하고, 서로 운동 하나씩 가르쳐줬다. 간만에 운동하니 좋다. 앞으로 계속 하기로 했다. 물론 미지수지만..."
- 2004.6.3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일본 친구들에게 배드민턴 채가 있어 멤버 결성이 되면 가끔 배드민턴도 했다.
비록, 이 운동 멤버들은 하나 둘씩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여행을 떠나 차츰 축소되었지만,
꾸준한 운동 덕분에 조금씩 몸이 가벼워진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도처에 맛있는 것들이 많고 매일 먹는 양을 조절하지 못하다 보니,
갈수록 '먹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갔다.
여름 방학 시즌에 줄넘기 멤버들이 빠지게 되면서 나중에는 나 혼자 남게 될 때도 있었다.
"휴. 트레이닝 멤버들이 줄어든다.
그래도 해야 해(надо)! 오늘은 줄넘기 1,400개!"
- 2004.6.22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줄넘기가 지쳐갈 때즈음부터 나의 굴랴찌(гулять 산책) 습관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혼자 웬만한 거리는 일부러 모두 걸어다녔다.
기본적으로 학교 주변이 매우 컸기 때문에 별도로 더 걸으려 본관 주변부터 산책했다. 참새언덕까지 나가는 길이 꽤 커서, 그곳을 트랙삼아 크게 도는 것이 일상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돌던 참새언덕 코스
좀 과식했다 싶은 날은 죄책감에 나가서 몇 바퀴든 돌고 들어오는 식으로 생활 패턴을 굳혀갔다.
나의 학교 주변 산책 코스는 정해져 있었다.
"다 먹어버리고 안되겠다 싶어 대충 챙겨서 참새언덕 앞 공원 5바퀴, 본관 주변 2바퀴 겁나게 걷고선 들어왔다. 이젠 걸어주지 않으면 불안해서..."
- 2004.10.6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언제부턴가 내 일기장은 온통 다이어트 기록이 되어버렸고
(물론 죄책감과 스스로 다그치는 얘기가 대부분),
하루라도 걷고 오지 않으면 몸이 개운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동네만 걷는게 지루해져 산책도 더 멀리 나가기 시작했다.
도심으로 연결되는 큰 길(레닌 대로)을 쭉 따라서 걷다 돌아오거나,
좀 더 걸으려고 일부러 장을 보러 멀리 떨어진 마트로 가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바운더리를 시내까지 조금씩 넓히게 됐다. 눈도 즐겁고 운동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결국, 산책은 최고의 감량 효과를 가져다 줬다.
크리스마스도 내 산책 스타일로 보냈다.
원래 러시아 크리스마스는 정교회 달력에 따라 1월 7일 기념하는지라, 통상적인 우리의 크리스마스 12월 25일은 평일이다. 나는 막상 12월 24일 이브를 그냥 보내기 아쉬워, 저녁에 홀로 시내 산책을 즐기러 나갔다.
물론 그때는 말년이라서 무서울게 없던 시기라 더 그래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이브, 모스크바 시내 산책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숙사에서 혼자 적막하게 보낼 순 없다 싶어 시내로 나가려 준비했다...(중략)... 일단 레닌 도서관에 내려 차이콥스키 음대 쪽 골목으로 주욱 내려갔다.. 그리고 트베르스카야 가로수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며, 계속 쏟아지는 눈을 맞아가며, 혼자 쇼하고 사진도 찍어가며 크리스마스 이브를 만끽하고 있었다.. (중략).. 돌아가려 트롤리버스를 탔는데 길이 너무 막혀 한 시간 반 가량을 차 속에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