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자마자 내가 분실확인서 얘기를 꺼내니, 담당자는 짜증 섞인 소리로 버럭 다음주 화요일에 오라고 한다.
그 옆에 있던 아저씨는 한술 더 떠 다음 달에 오라는 거다.
꼭지가 막 돌려는 순간,
그래, 그 분을 만나야 겠다!
아침에 국제부에서 받은 책임자 이름이 적힌 쪽지, 나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 때부터 꼬였던 일은 일사천리로 풀리기 시작한다.
그 날의 기억. 종이에 적힌 경찰서 책임자의 이름.. 마튜힌 아저씨!
"종이에 적힌 이름 하나 가지고 그 사람을 찾으러 갔다. 문으로 격리된 어느 다른 경찰 부서로 들어간 이후부턴 모든게 내 몫이었다. 언니 오빠는 다 문밖에 있었기 때문에 난 당연히 긴장하고 쫄아있었다 ...(중략)... 나는 러시아어로 더듬거리며 두서없이 정신없이, 그러나 침착하게 설명했다.곧 경찰관이 종이에 적힌 마튜힌에게 전화해보더니, 그분이 왔다. 그는 내게 오자마자 주위에 있는 다른 경찰관에게 분실확인서를 당.장. 만들어주라고 지시했다. 역시 상사의 지시가 무서운 건지 그때부터 바로 프린트 작업을 하고 사인과 도장을 받아 내 손에 쥐어주는 것이다."
- 2004.4.9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10분만에 끝났다.
문서 처리하는 아저씨가 분실확인서를 주고 악수를 청하며 건넨 '축하한다(поздравляю)' 한 마디는 정말 잊을 수 없는 멘트다. 무지하게 모순적인...
시간과 나 자신과의 기나긴 싸움이었다.
그렇게 받은 분실확인서로 대사관 영사과에 여권 재발급을 신청했고, 담당 영사님 잔소리(!)는 덤.
정확히 일주일 후 여권을 받으니 정말 눈물겨웠다. 이제 거주지등록만 하면 되겠거니 했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 이후 치러야 할 일들은 너무나 가혹했다.
재발급 받은 여권에도 거주지등록이 있어야 현지 체류에 문제가 없기 때문에,
나는 당연스레 여권을 가지고 거주지등록증을 내주던학교 부서로 향했다.
참 이때 내가 러시아어만 조금 됐어도 이런 생고생은 덜 했을까? 교환학생으로 와서 통역을 대동해서 가는 상황들이 매번 나는 혼란스러웠다. 통역 도와주러 오셨다가 잘 해결되지 않을 때마다 그분들께 빚만 지는 느낌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더욱 서글펐다.
거주지등록 부서에서는 이것저것 알아보더니, 나에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다.
"젊은 여직원이 내 문제를 알아봐주더니 뭐라뭐라 하는데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으나, 분명한 건 정말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는 거다. 한국에 갔다와야 한다는 어이없는 소리 ...(중략)... 비자를 그 전과 똑같이 받아와야 제대로 된 거주지등록을 해준다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10일짜리 거주지등록을 발행해줄 테니 한국 갔다와라'는 거다. 어안이 벙벙해져 돌아와..."
- 2004.4.19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러시아에 온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한국에 다녀오라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때부터 내 상황을 주변에 알려 이런 케이스가 있는지 물어봤고, 많은 분들이 백방으로 해결 방법을 찾아보려 애써주셨다.
제3국에 가는 방법, 현지에서 비자와 거주지등록을 받는 방법 등등...
하지만 매번 답은 '별 수 없다'는 거였다.
다시 찾아간 거주지등록부서에서는 제3국 출국 등 대안을 얘기해보니 법이 바뀌어 안 된다고 한다.(러시아에서 가장 빈번하게 들을 수 있는 핑계) 난 이리도 운이 안 좋은 걸까!
"아~ 어쩌란 말이냐. 이곳에 온지 80일도 채 안 되는데 추방당하게 생겼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
- 2004.4.23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이놈의 러시아 학교. 겉만 멀쩡하고 속은....
그런데 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나와 똑같은 날 여권을 도난당한 언니는 한국에 가지 않고도 거주지등록을 받았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언니가 다니는 어학연수 기관은 외국인 학생들이 많아 시스템이 조금 달랐나보다.
왜 거긴 되고, 여긴 안 되지?
이 상태로 있다간 불법체류로 추방당할 거라 했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는데, 결국 한국으로 가는 방법뿐. 나는 매일이 괴롭고 힘들었는데, 친구들은 평소처럼 웃으며 추방비자 받아 다녀오란 농담까지 하니 내심 섭섭했다.
결국,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비자를 받아오는 걸로 맘을 정했다. 물론 언제 받을지 모를 초청장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남아있었지만, 어버이날 맞춰 가서 부모님께 선물로 가는 셈 치고.
출국까지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결국 1년 오픈 티켓을 너무 일찍 사용하게 됐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 채 기약 없이 3개월만에 한국행에 오른 것.
가족들과 눈물의 상봉.
그 소동이 있고 난 뒤 집에서도 여기저기 알아봐주셨고,
다행히 건너건너 아는 분 인맥으로 러시아 대사관 사람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초청장도 없이 그냥 인맥만 믿고 무작정 간 거였다. 러시아에서 너무 당했던지라, 뭐 크게 희망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은 너무도 쉽게 풀렸다.
"현지 거주등록을 증명할 만한 자료가 없으면 비자를 못내준다는 말에 낙심했었다. 대사관을 등지고 나오는 길에 나는 갑자기 6월 30일까지 되어있는 기숙사 통행증이 생각났다. 그래서 단숨에 다시 가서 보여주니, 이건 되는 건가 보다. 자료를 찍어서 넘겨줬다. 비용을 내고 10분 정도 기다리니 내가 그토록 필요했던 비자가 너무나 쉽게 나와버렸다. 받고 나니 오히려 황당하고 허무했다. 휴... 원래 초청장 없이는 안 해주는데 이런저런 자료를 내서 이리도 빨리 해준다. 역시 한국이라 빠른가."
- 2004.5.11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마찬가지로 10분만에 끝났다.
세상에 이럴 수가. 경찰서에서 분실확인서 발급 시간도 단 10분이었다.
비자를 받기가 무섭게 최대한 빠른 날짜의 항공 티켓으로 러시아로 돌아왔다.
정말 폭풍우처럼 몰아친 시간이었다. 제대로 갖춰진 여권을 들고 거주지등록 사무실로 향했더니,
평소 얼음처럼 차갑던 직원이 내 비자를 보고 막 웃는다. '얘 진짜 빨리 왔네' 그냥 어이없어 하는 느낌이었다.
이 문에 빨리 들어오고 싶어서
그렇게 호되게 당한 이후, 나는 여권을 목숨처럼 아끼게 됐다.
절대로 가방에 넣지 않고 옷 속에 숨기고 다녔다. 어머니가 코팅 비닐을 한땀한땀 바느질해 만들어주신 주머니 목걸이에 여권을 넣고 목에 걸어 최대한 몸에 밀착해 보관했다.
'참 유별나다' 할 정도로 나에게 이 사건은 러시아 갈 때마다 지금도 노이로제처럼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