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⑤ 오페라와 맞바꾼 여권

여권 도난당한 후 '내일 오세요' 매일 러시아 경찰서행

by 모험소녀

문화예술의 나라 러시아에 왔으니

볼쇼이 극장에서 공연은 꼭 보고 싶었다.

그런데 발레나 오페라, 발레 등 공연은 대부분 7시에 시작해 밤 늦게 끝나니 귀가가 걱정거리였다. 치안이 좋지 않던 당시에는 밖이 어두워지면 무조건 집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볼쇼이 극장 속 <예브게니 오네긴>

한창 몸을 사리던 유학시절 초창기,

마침 한국 학생들 일행이 볼쇼이 극장에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보러 간다기에 나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단체로 다녀오면 위험할 걱정은 없겠다 싶어서였다.


내 생애 첫 오페라는 무려 3시간 넘게 이어졌다. 나름 러시아에서 처음하는 공연 관람이었으나 관람시간은 너무 길고, 러시아어도 어려운데 노래로 표현하니 눈치와 짐작으로 줄거리를 가늠했다.


그리고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기숙사로 돌아오는 지하철.

나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오페라가 끝나고 다같이 지하철을 타러 갔다.(이때 택시를 탔어야 하는데!) 지하철 객차로 들어가는 그때!! 중앙아시아 동양계 몇 명이 내 주변을 감싸더니 나가려고 하질 않는거다. 난 눈치 채고 잽싸게 뿌리쳐 객차 안으로 들어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권과 유학생 보험증을 도난당한 걸 알았다."

- 2004.3.30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나는 소매치기들이 갑자기 나를 둘러싸고 막 밀어낼 때,

양쪽 손은 주머니 속 지갑과 학생증을 꼬옥 쥐고(그 찰나에 나는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격렬하게 몸싸움하며 그들 사이를 비집고 객차로 들어왔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서야 무사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내 작은 크로스백 앞 주머니가 열려있는게 아닌가?

그날의 기억, 이게 뭐라고...


그렇게 나의 분신인 여권을 도난당했다.

그나마 위안되었던 건 나 혼자만 당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같이 갔던 학교 선배 언니도 지하철역 들어오는 길에 이미 당한 터였다. 당시 동양인 여권이 비싼 값에 그들만의 시장에서 거래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여권은 누군가의 뱃속을 채워주었겠구나.


한 순간 피해자가 된 동시에 풀어야 할 거대한 과제를 안게 된 우리,

여권을 어떻게 다시 받지?




다음 날,

한국 대사관에 가서 알아보니 여권을 분실했다고 바로 만들어 주는게 아니었다. 러시아 경찰서에서 분실확인서(справка)를 받아와야 재발급이 된단다. 그때 학교 본관 지하에 경찰서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내가 한국에서도 안 가본 경찰서(милиция)*를 가야 한다니... 그래도 문서 하나만 받아오면 되겠거니 했다.

* 지금은 폴리스(полиция)라는 용어를 쓴다.


처음 찾아간 학교 경찰서.

경찰들이 여기서는 발급까지 열흘이 걸리니 분실한 지역의 경찰서로 가서 받으라는 식으로 얘기한다.

하지만 주변에 여기저기 알아보고 물어본 결과, 결국 학교 경찰서에서 해결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다음 날 다시 찾아간 경찰서.

통역해줄 분과 함께 가서 상황을 설명을 하니 한창 좀 잘되겠다 싶었는데,

이 말 한 마디로 끝났다.

내일 오후에 오세요.


"정말 여기가 러시아이긴 하구나.

내일 간다고 일이 처리될 수 있을까?"

- 2004.4.1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경찰서 방문 3일째.

제발 오늘은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발걸음했다.

나의 여권 도난 동료인 선배 언니를 담당한 인상좋은 경찰관은 바로 진술서(заявление) 작성을 진행했지만, 내 담당은 답답해하며 통역을 데리고 오란다. 실랑이 벌이다 결국 나도 언니 담당 경찰관의 도움을 받았다.

진술서에 쓸 내용을 일일이 불러주는 자상함이란. 참 같은 러시아 경찰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담.

다음 주 화요일에 받으러 오세요.


분실확인서를 바로 받지 못해 아쉬웠어도,

절반 정도는 해결된 것 같아 뿌듯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오라고 한 날,

경찰관의 단호한 이 한 마디에 어떤 토를 달 수도 없었다.

내일 3시 이후에 오세요.


그 다음 날 또 경찰서에 갔다. 이러다 정들겠다.

선배 언니의 분실확인서는 발급되었는데,

내 건 이리저리 알아보더니 벌써 여러번 들은 얘기를 또 하는 거다.

내일 오세요.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

내일은 또 그 퉁명스런 아저씨일텐데... 걱정이다. 내일은 꼭 받아야 하는데!!!"

- 2004.4.7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다음 날,

본관 지하 어두침침한 경찰서가 이젠 익숙해질 즈음,

나는 '얘들이 작정을 했구나' 싶은 소리를 들었다.

도장 담당 직원이 오늘 아파서 도장을 찍어줄 수 없어요.
내일 오세요.


어두침침한 경찰서 오가며 화려했던 당시 극장을 떠올렸다. '대가가 너무나 큰 공연이었구나.'

경찰서에서 '내일 오라'는 소리만 도대체 몇 번을 들은걸까? 돈을 요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도 순순히 따를 생각이 없다. 이제는 오기가 생겼다. 절대 돈 안 주고 받아내고 말거야!


"경찰서 담당관이 너무 삭막해서 끽소리도 못하고 나와버렸다...

휴.. 정말 왜 다 이런 식이지?"

- 2004.4.8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다음 날 아침,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여 수업 후 마리아 선생님께 나의 상황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 물었다.

평소 진취적이고 활동적이라 내가 좋아한 선생님. 얼마 전 내가 여권 도난당한 얘기를 해서 알고는 계셨는데, 지금껏 해결되지 않은지는 모르셨다. 내 얘기를 듣자마자 도와주시려 당장 발걸음을 옮기셨다.


"마리아 선생님은 당장 같이 국제부에 가서 담당자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주며 얘기했다. 그 담당자도 내게 몇 마디 물어보더니 곧 본관 경찰 부서에 전화를 해주겠다고 했다. 아... 그래! 이제야 상황이 좀 해결되겠구나 싶었다. 전화를 해보더니 만약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 사람을 찾아가라며 친절하게 경찰 책임자의 이름까지 적어주었다."

- 2004.4.9 나의 모스크바 교환학생 일기


마리아 선생님과 국제부의 지원사격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드디어 그날 오후,

총알을 장전하고 경찰서로 향하는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 다음 이야기 '한국행, 아니면 추방'으로 이어집니다 -

'내일 오세요' 매일 반복되는 경찰서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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