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하는 법
토요일 오후, 공원을 걸었습니다. 바람이 일 때마다 낙엽이 소복하게 쌓이고, 금세 또 흩어지는 그 움직임이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아 있던 감정의 조각처럼 느껴졌습니다.
계절이 겨울의 문턱에 가까워질수록 공원은 조금씩 비워지기 시작합니다. 벤치에 앉았다 가는 사람도 줄고, 나무 아래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만 낮게 깔린 햇빛 속에서 조용히 흔들립니다.
곧 이 풍경도 사라지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지금 이 공기가 유난히 아쉽습니다.
시인 존 키츠는 가을을 두고 “안개와 원숙한 결실의 계절”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익어가는 열매들은 곧 떨어질 운명이지만, 바로 그 순간이 가장 풍성하고 빛나는 때이기도 하지요.
곧 사라질 것을 바라보며 우리가 오히려 그 순간을 더 선명하게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쓸쓸함 속에는 늘 한 줄기 빛이 있고, 낭만 속에는 아주 작은 아릿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계절의 풍경은 언제나 두 감정을 포개어 보여주는지도 모릅니다.
쓸쓸함은 특정 세대만의 감정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오지만, 그 모양은 살아온 시간만큼 각각 다릅니다.
청년에게는 앞으로의 선택들 앞에서 흔들리는 설렘과 불안의 결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중년에게 쓸쓸함은 지나간 시간과 남아 있는 것들을 한꺼번에 바라보게 만드는 조용한 울림이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쓸쓸함은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맞는 바람의 차가움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는 밤길의 고요함으로 다가오기도 하겠지요.
세대가 달라도 쓸쓸함이 찾아오는 방식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쓸쓸한 감정은 늘 속도를 늦추는 순간에 스며듭니다. 바람이 잦아들 때, 하늘의 빛이 조금씩 스러질 때, 혼자 걷다가 문득 내 마음의 그림자를 보게 될 때.
작가 메이 사턴은 말했습니다.
“외로움은 자아의 빈곤이고, 고독은 자아의 풍요다.”
우리가 쓸쓸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마음의 결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쓸쓸함과 낭만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서로를 비춥니다. 둘 다 “사라짐”에 대한 감각에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빛을 잃어가는 오후, 나뭇잎이 마지막 힘을 내어 붉게 타오르는 순간, 빈 벤치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짧은 흔적.
우리는 언제나 곧 사라질 것을 바라보며 그 순간이 더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그 찰나의 감정이 바로 쓸쓸함과 낭만이 만나는 지점이겠지요.
사람마다 쓸쓸함의 모양은 다르더라도 그 감정이 건네는 메시지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쓸쓸함은 우리 안에 아직 따뜻함이 남아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 따뜻함이 있으니 우리는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떠올리고, 어떤 풍경에 오래 머물고 싶어 집니다.
세대가 다르고, 삶의 위치가 달라도, 쓸쓸함이 우리를 찾아올 때 우리는 모두 조금씩 닮아갑니다.
사라져 가는 것을 붙잡고 싶어 하고, 덧없음을 사랑하게 되고, 흘러가는 시간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 감정이 바로 인간이 가진 쓸쓸한 낭만 아닐까요?
곧 공원의 온도는 더 차가워지겠지요. 나무들은 마지막 잎을 털어내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점점 줄어들 겁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쓸쓸함이 낭만으로 변하는 이 짧은 계절은 우리가 무언가를 잃어가는 대신
다른 감정을 얻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라져 가는 것의 아름다움, 멈춰 서야만 들을 수 있는 마음속의 작은 목소리, 빛이 스러질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
이 모든 것이 늦가을이 우리에게 전하는 아주 조용한 선물입니다.
바람을 따라 낙엽이 떨어지고, 그 사이로 계절은 한 발짝씩 겨울로 들어갑니다.
나는 공원을 산책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쓸쓸함이란
결코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감정이 아니라,
낭만으로 향하는 가장 고요한 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토요일 오후의 공원에서 그 길의 끝에 남아 있는 조용한 빛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마음속에 받아 적었습니다.
사라지는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계절이 바뀌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