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기억을 잇는 비, 마음을 적시는 사랑 - 8장 -
비는 멈췄지만, 공기에는 아직 습기가 남아 있었다.
서하는 조약돌을 손에 쥔 채 현우와 나란히 걸었다.
젖은 거리를 함께 걸으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비가 그치니까 이상하게 더 조용하네요.”
현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 조용함이 나쁘진 않아요.”
그녀는 현우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마치 우리가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서하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과거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었다.
‘현우 씨가 정말 그때의 소년일까?’
조약돌을 쥐는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현우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서하 씨, 무슨 생각해요?”
서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현우 씨, 혹시 그때의 기억을 더 떠올려 본 적 있어요?”
현우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최근에 조금씩 더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서하는 그의 대답에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어떤 기억이요?”
“개울가에 앉아 있던 모습이요. 물수제비를 뜨면서 웃던… 그리고 마지막에 조약돌을 건네며 무언가 약속했던 장면이 더 또렷해졌어요.”
서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현우 씨도 같은 기억을 보고 있는 거야?’
현우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서하를 바라보았다.
“근데 이상한 게 있어요. 그때 그 소녀의 얼굴이… 자꾸 서하 씨 얼굴로 겹쳐 보여요.”
서하는 그의 말을 듣고 놀라며 손에 쥔 조약돌을 바라보았다.
“나도… 비슷한 느낌이에요. 그 소년이 현우 씨 같다고 자꾸 느껴져요.”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비가 멈춘 거리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다.
하지만 서하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불안이 남아 있었다.
‘혹시 이 모든 게 착각이면 어떡하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우리가 그때의 아이들이 아니면… 그땐 어떻게 할 건가요?”
현우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럼 그건 상관없어요. 과거가 우리를 연결해줬든 아니든, 지금의 서하 씨가 더 중요하니까요.”
서하는 그 말을 듣고 조약돌을 손에 꼭 쥐었다.
‘맞아. 중요한 건 지금의 선택이야.’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근데 가끔은 궁금해요. 우리가 정말 그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만난 거라면, 그 의미를 잃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현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서하 씨, 그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건 서로를 믿는 거예요. 조약돌도, 비도, 결국엔 우리가 만들어 가는 의미일 뿐이에요.”
서하는 그의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번엔 과거를 되돌리는 게 아니라, 새로운 약속을 만들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젖은 돌들이 반짝이는 길을 따라 나란히 걸어갔다.
서하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과거와 현재가 이렇게 겹쳐지는 건, 어쩌면 우리에게 또 다른 시험일지도 몰라.’
그녀는 주머니 속 조약돌을 손끝으로 굴리며 결심했다.
‘다음 비가 올 때까지, 나는 이 관계를 지켜낼 거야.’
어느새 하늘은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현우는 그녀의 옆에서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하 씨, 비가 올 것 같아요.”
서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비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비를 함께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비는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서하는 현우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가늘게 내리는 빗방울이 두 사람의 어깨를 적셨지만, 어느 쪽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현우 씨, 이 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과 비슷하네요.”
서하는 주머니 속 조약돌을 손끝으로 굴리며 말했다.
현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땐 갑자기 쏟아졌었죠. 여우비처럼.”
“맞아요. 그때도, 지금도… 이 비는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는 것 같아요.”
서하는 문득 멈춰 섰다.
조약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바라보았다.
“현우 씨.”
그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만약 이 조약돌이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한 거라면… 우리가 잊었던 약속을 꼭 지켜야 할 것 같아요.”
현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조약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약속, 기억나요?”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어요. 이 돌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현우는 조약돌을 천천히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그 말… 나도 희미하게 기억나요. 그래서 이 돌이 우리에게 다시 나타난 걸까요?”
서하는 깊은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이 돌이 운명이었든, 우연이었든… 중요한 건 우리가 다시 만났다는 거예요.”
현우는 그녀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새로운 약속을 해야겠네요.”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다.
두 사람은 근처의 작은 정자 아래로 뛰어 들어갔다.
젖은 옷을 털어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현우 씨, 솔직히 말해요. 우리 이 조약돌을 너무 운명처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현우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서하 씨, 난 운명을 믿지 않으려 했어요. 우연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죠. 근데…”
그는 창밖의 빗줄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을 만난 이후로는 자꾸 운명을 의심하는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어요.”
서하는 그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현우 씨…”
그 순간, 현우가 조약돌을 그녀의 손에 올려놓았다.
“이 돌은 우리를 연결해 준 것 같아요. 하지만 앞으로는 이 돌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이 관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하는 조약돌을 손에 꼭 쥐었다.
“맞아요. 이제는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해요. 운명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으로.”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서하는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으며 웃었다.
“비가 멈추더라도, 이번엔 우리가 멈추지 않아요.”
현우도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젠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요.”
서하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입을 열었다.
“현우 씨, 혹시 개울가에서 약속했던 마지막 장면 기억나요?”
현우는 그녀의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흐릿해요. 뭔가를 약속했던 건 기억나는데, 정확히 뭐였는지는…”
서하는 조약돌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만날 거라고 했어요. 서로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현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약속은 아직 유효하네요.”
비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다시 정자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하늘 사이로 희미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서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가 멈췄어요.”
현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렇네요. 이제 비가 없어도 우린 계속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서하는 조약돌을 손에 쥐며 결심했다.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 이 관계를 만들어 갈 거야.’
그녀는 현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젠 비가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현우는 그녀의 손을 더 꼭 쥐며 대답했다.
“그래요. 우린 더 이상 비에 기대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