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기억을 잇는 비, 마음을 적시는 사랑 - 9장 -
비는 멎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하는 조약돌을 손끝으로 굴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흐리지만 비가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없어도 괜찮다고 했잖아.’
그녀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함이 가슴 한쪽을 무겁게 눌렀다.
그날 저녁, 서하는 현우와의 약속을 위해 카페로 향했다.
비가 멈춘 거리에는 반짝이는 물웅덩이들이 남아 있었다.
서하는 그 물웅덩이를 밟으며 걸었다.
‘우리도 이렇게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현우는 창가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하는 그를 보자마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기다렸어요?”
“아니요. 그냥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나 서하의 마음속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고민이 있었다.
“현우 씨.”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정말 괜찮을까요?”
현우는 그녀의 질문에 놀란 듯 눈을 마주 보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서하는 주머니에서 조약돌을 꺼내며 말했다.
“비가 멈춘 뒤, 모든 게 달라질 것 같아서요.”
현우는 조약돌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비가 멈췄다고 우리도 멈출 거라고 생각해요?”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하 씨, 우리가 선택한 거잖아요. 조약돌이든 비든, 그건 그냥 계기였을 뿐이에요.”
현우의 말은 단호했지만, 그 안에는 그녀를 향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서하는 조약돌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현우 씨는 정말 불안하지 않아요?”
현우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불안하지 않으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서하 씨가 내 옆에 있으면 괜찮아요.”
서하는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에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그 말을 믿고 싶어요.”
그 순간, 카페 창밖으로 노을이 비쳤다.
서하는 노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 이번에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로 해요. 이 돌도… 이제는 그냥 돌이에요.”
그녀는 조약돌을 현우에게 내밀었다.
현우는 놀란 듯 조약돌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받았다.
“그래요. 이제 이 돌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가 만들어 가요.”
두 사람은 테이블 위의 조약돌을 바라보며 웃었다.
비가 멈추고 노을이 지는 순간, 그들의 선택은 더 이상 운명에 기대지 않는 것이었다.
서하는 조약돌을 다시 그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이젠 우리 선택을 믿어요.”
하지만 그때, 서하의 휴대폰이 울렸다.
회사에서 온 메시지였다.
“내일까지 보고서 제출 필수. 일정 재조정 불가.”
서하는 순간 굳어졌다.
현우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회사에서 급하게 내일까지 일을 마무리해야 한대요.”
현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또 바빠지겠네요.”
서하는 그의 말에서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현우 씨, 이번엔 다를 거예요.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그녀는 재빨리 말을 했지만, 현우의 표정은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서하 씨, 괜찮아요. 하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기다리게 되면… 그땐 나도 확신을 잃을지도 몰라요.”
서하는 그 말에 순간 움찔했다.
‘이번엔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하지만 현실의 압박은 여전히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은 더 깊어졌다.
서하는 현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현우 씨, 나 믿어요?”
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믿어요. 하지만 이제는 서하 씨도 스스로를 믿어야 해요.”
카페를 나서며 서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번엔 내가 선택해야 해. 기다림이 아니라, 지켜내는 선택을.’
조약돌은 주머니 속에서 묵직한 온기를 전하고 있었다.
비는 멈췄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서하는 카페를 나서며 현우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손을 감싸 쥐었다.
“서하 씨, 이번에는 내가 기다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하지만 그의 말은 서하의 가슴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기다리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또 기다리게 하고 있어.’
사무실로 돌아온 서하는 서둘러 일을 마무리했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손끝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현우의 표정이 계속 떠올랐다.
‘현우 씨는 이번에도 날 믿어주고 있는데, 나는 이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확인했다.
현우:
“힘들면 언제든 말해요. 전 여기 있어요.”
서하는 그 메시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정말 기다려줄까? 아니면… 이 기다림 끝에서 지칠까?’
며칠 후, 현우와의 약속.
서하는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급하게 카페
로 향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은 어두웠다.
‘늦지 말아야 해.’
카페 문을 열자, 현우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지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하 씨.”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어딘가 지친 느낌이 스쳤다.
서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정말 바빴어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서하 씨가 바쁘다는 거. 그런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조금 불안했어요. 내가 너무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서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현우 씨, 그런 말 하지 마요. 난…”
현우는 그녀의 말을 자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서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난 현우 씨를 믿어요. 그리고 우리 선택을 지키고 싶어요.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요즘 너무 현실에 휩쓸려서 그걸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현우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다가 말했다.
“저도 알아요. 서하 씨가 노력하고 있다는 거. 그런데 기다리는 게 쉽진 않더라고요.”
서하는 그 말에 마음이 더 아팠다.
‘이 사람은 항상 나를 기다려주기만 했어. 그런데 나는…’
그녀는 조약돌을 꺼내 현우의 손에 올려놓았다.
“현우 씨, 이 돌이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준 건 맞아요. 그런데 이젠 이 돌에 의지하지 않을 거예요.”
“서하 씨…”
“이제는 내 선택으로 현우 씨 옆에 있을 거예요.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현우는 조약돌을 손에 꼭 쥐었다.
“저도 약속할게요. 서하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옆에 있을 거라고.”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었고, 서하는 그 말에 안도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밖에서는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이 두 사람의 손을 감싸는 듯했다.
서하는 현우의 손을 꼭 잡으며 속삭였다.
“이 비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려고 오는 것 같아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그쳐도 우린 멈추지 않을 거예요.”
서하는 조약돌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결심했다.
‘이제는 비가 아니라 내가 이 관계를 지킬 거야.’
그녀는 현우의 손을 꼭 쥔 채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