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기억을 잇는 비, 마음을 적시는 사랑 - 6장 -
비가 그치고 며칠이 지났다.
서하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켰다.
작업해야 할 프로젝트가 쌓여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키보드를 두드리는 대신 주머니 속 조약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현우 씨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와의 만남 이후, 서하는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많이 흔들리고 있는지 점점 더 자각하게 되었다.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 그 사람 생각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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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야!”
지은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하는 급히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었다.
“뭐야, 또 그 돌 만지고 있었어?”
지은은 커피를 들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설마 아직도 그 남자 생각하고 있는 거야?”
서하는 고개를 저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마음 정리 중이야.”
“마음 정리? 그럼 제대로 정리나 해. 아니면 그냥 직진을 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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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지은의 단호한 말에 피식 웃었다.
“말처럼 쉽지 않아.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지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바쁘다는 핑계로 사람 하나 밀어내려고?”
서하는 순간 당황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냥… 현우 씨도 내 상황을 이해해 주고 있고, 나도 무리하고 싶지 않아서.”
“너답지 않게 왜 이렇게 소극적이야? 서하야, 때로는 누군가를 선택하는 게 일을 정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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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며 지은의 말을 곱씹었다.
‘선택… 또 선택이야.’
조약돌이 차가운 온기를 전해주었지만, 마음속 혼란은 여전히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근데 있잖아.”
지은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현우 씨가 그 정도로 기다려줄 사람일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떠나버릴 사람일까?”
서하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왜 이렇게 두려운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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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서하는 집에 돌아와 엄마와 대화를 나눴다.
“서하야, 요즘 무슨 일 있어? 요새 계속 멍하니 있는 것 같더라.”
엄마의 물음에 서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냐, 그냥 회사 일이 바빠서 그래.”
“회사 일이 그렇게 신경 쓰였으면 조약돌은 왜 만지작거리는 거야?”
서하는 손에 쥐고 있던 돌을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엄마는 그거 언제부터 가지고 다녔는지 알아?”
엄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거? 너 어릴 때 개울가에서 주웠잖아. 그때 그 돌 하나 주워서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
“혹시 그때 나랑 같이 있던 사람 기억 안 나?”
엄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네가 혼자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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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엄마의 말에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정말 내가 혼자였던 걸까? 아니면 엄마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그녀는 조약돌을 손에 쥔 채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현우 씨가 내 기억에 있던 사람이 맞을까?’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려 눈을 감았지만, 그 순간 비 내리던 개울가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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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서하는 현우와의 약속을 잡았다.
현우는 그녀의 전화를 받고 기쁘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하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목소리에 서하는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현우 씨는 여전히 날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머뭇거리는 걸까?’
그녀는 조약돌을 손에 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내 마음을 더 솔직하게 전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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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의 재회.
서하는 창가에 앉아 있는 현우를 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서하 씨, 잘 지냈어요?”
서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동안 바빠서 연락 늦었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요.”
그의 말에 서하는 조약돌을 손에 쥐며 결심했다.
“현우 씨, 이번에는 내가 더 확실하게 다가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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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는 여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하는 창밖의 빗방울을 바라보며 현우의 손을 잡았다.
“비가 또 우리를 연결해 주네요.”
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엔 비가 그쳐도 괜찮을 거예요.”
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다짐했다.
‘현실의 압박도, 불안도 이겨낼 수 있어. 이제는 나도 선택할 거야.’
비가 그치고 밤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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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주머니 속 조약돌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스쳤다.
현우와 함께 나눈 대화, 지은의 직설적인 조언, 엄마의 애매한 기억.
모든 것이 그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내가 너무 서두르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 발을 빼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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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서하는 지은과 다시 만났다.
지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서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현우 씨와 더 자주 만나보기로 했어. 이번엔 내 선택을 지키려고.”
지은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잘 생각했어! 근데 네가 결정했으면 흔들리지 마. 현실이든 과거든 둘 다 네가 만들어 가는 거야.”
서하는 그 말을 들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감과 다짐이 동시에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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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족의 반응은 달랐다.
집에 돌아온 서하는 엄마와 저녁을 먹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 나 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어.”
엄마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서하를 바라보았다.
“그래? 어떤 사람이야?”
서하는 웃으며 말했다.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야. 아직 잘 알아가는 중이지만, 뭔가 오랜 인연처럼 느껴져.”
하지만 엄마의 표정은 조금 무거워 보였다.
“서하야, 넌 늘 앞만 보고 달려왔잖아. 이젠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
엄마의 말에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딘가 묘한 불안감이 가슴 한구석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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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서하는 현우를 다시 만났다.
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지만,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서하는 카페에 앉아 있는 현우를 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현우 씨.”
그는 그녀를 보며 반갑게 웃었다.
“서하 씨, 잘 지냈어요?”
서하는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현우 씨, 오늘은 조약돌 얘기 말고… 우리 얘기를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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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는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 얘기요?”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의 우리를 말이에요.”
현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난 때때로 불안해요.”
서하는 그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불안해요? 뭐가요?”
“우리가 진짜 과거에서 연결된 사람이라면, 그만큼 더 쉽게 무너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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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그의 말을 듣고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더 잘 지켜야죠. 과거가 우리를 연결해줬다면, 지금은 우리가 그걸 지켜야 할 때예요.”
현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맞아요. 그런데 가끔은 현실이 더 두려운 걸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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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현우 씨, 두려울 때마다 이 조약돌을 생각해요. 이 돌이 운명이든, 선택의 상징이든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함께 있다는 거잖아요.”
현우는 조약돌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 씨 덕분에 조금 더 믿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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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다시 올 것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서하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비가 오든 오지 않든, 난 현우 씨와 함께 걸어갈 거예요.”
현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손을 꼭 잡았다.
“그럼 우리, 다음 비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계속 만나봐요.”
서하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요. 이젠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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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
서하는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으며 결심했다.
‘이제는 과거에 기대지 않고, 우리가 만든 현재를 지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