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기억을 잇는 비, 마음을 적시는 사랑 - 5장 -
비가 그친 뒤의 하늘은 맑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흐렸다.
서하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는 처리해야 할 보고서와 끝나지 않은 프로젝트 일정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현우와의 대화로 가득했다.
‘운명과 선택…’
서하는 조약돌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이게 운명이라면, 현실은 어떻게 해야 하지?’
“서하 씨, 회의 10분 전이에요!”
동료의 목소리에 서하는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자료를 정리했다.
“네! 곧 갈게요.”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팀장은 서하를 향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하 씨, 이번 캠페인 시안 수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어요. 다음 주까지 다시 검토해서 올려주세요.”
서하는 당황했지만,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다음 주…? 현우와의 약속은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으로 가득 찼다.
퇴근 후, 카페.
서하는 약속된 시간에 맞춰 카페에 도착했지만, 현우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웃으며 인사했지만, 서하는 그 미소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무슨 일 있었어요?”
현우는 그녀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하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에서 일이 많아졌어요. 다음 주까지 시안을 다시 작업해야 해서… 정신이 없을 것 같아요.”
현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많이 힘들겠어요.”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실망이 섞여 있었다.
서하는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현우 씨, 우리 다음 주 만나는 건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현우는 잠시 침묵했다.
“괜찮아요. 일 먼저 하셔야죠.”
현우는 부드럽게 웃었지만, 서하는 그 미소에서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졌다.
“정말 괜찮아요?”
“그럼요. 서하 씨가 중요한 일을 잘 마무리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대화는 어딘가 어색하게 흘렀다.
서하는 조약돌을 쥐면서 마음속의 불안을 느꼈다.
‘이게 맞는 걸까? 내가 지금 일에 집중하는 게 옳은 선택일까?’
그러나 현실의 무게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혹시 일이 끝나면 연락 주세요. 언제든 시간 괜찮을 때요.”
현우의 말에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카페를 나서며 서하는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현우의 뒷모습이 비에 젖은 듯 아련하게 보였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우리 관계는 그대로 멈춰버리는 걸까?’
서하는 조약돌을 꼭 쥐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건 운명이야? 아니면 그냥 내 선택이 틀린 걸까?’
다음 날 아침, 사무실.
서하는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현우를 향해 흔들렸다.
그의 조용한 미소와 이해하는 듯한 눈빛이 계속 떠올랐다.
‘그 사람도 지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그의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서하 씨, 일이 끝나면 꼭 연락 주세요.”
짧은 메시지였지만, 그 안에는 기다림이 담겨 있는 듯했다.
서하는 잠시 일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쳤지만, 공기 속에는 비가 내릴 듯한 습기가 감돌았다.
‘비가 내리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다시 조약돌을 손에 쥐며 결심했다.
‘운명을 기다리는 대신, 내가 선택해야 해.’
비가 올 듯한 하늘 아래, 서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회사에서 마감 일정에 치여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이제서야 현우에게 연락을 할 시간이 생겼다.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현우에게서 온 답장은 없었다.
‘바쁠까? 아니면… 기다리다 지친 걸까?’
조약돌을 손에 쥐며 서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게 우리가 만든 선택이라면, 지켜내야 해.’
카페.
서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익숙한 자리에는 현우가 없었다.
그가 항상 앉아 있던 창가 자리는 비어 있었고, 그녀는 그 자리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혹시 오지 않았을까 했는데… 괜한 기대였나 봐.’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조약돌을 꺼냈다.
‘이 돌이 연결해 줄 거라고 믿었는데…’
문이 열렸다.
서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현우였다.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서하를 발견하자 살짝 놀란 듯 웃어 보였다.
“서하 씨.”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우 씨,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현우는 자리에 앉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제가 너무 기다리게 한 건 아닐까 걱정했어요.”
서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바빠서 신경을 못 쓴 거죠.”
현우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아요. 서하 씨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 사람인지.”
하지만 그의 말속에는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서하는 그 미묘한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현우 씨.”
그녀는 조약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 돌, 기억나요? 우리가 이걸 믿기로 했던 거요.”
현우는 조약돌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기억하죠. 하지만 서하 씨…”
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돌이 우리를 연결해 준 건 맞아요. 그런데…”
서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현실은 조약돌만으로 해결되지 않잖아요.”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다.
“제가 기다리는 동안 계속 생각했어요. 이게 진짜 운명이라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서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마음속의 불안을 꾹 눌렀다.
“현우 씨, 우리 스스로 선택하자고 했잖아요.”
현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두려운 거예요. 선택이 틀리면 어떻게 하죠?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면…”
서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더 노력하면 돼요. 조약돌이 상징하는 건 운명이지만, 우리가 만든 선택이 운명보다 더 강하다는 걸 보여주면 되잖아요.”
현우는 그녀의 말에 조용히 웃었다.
“서하 씨는 언제나 용감하네요.”
서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용감한 게 아니에요.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그냥 이 순간을 지키고 싶을 뿐이에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하는 창밖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 비가 다시 우리를 연결해 주는 것 같네요.”
현우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약돌을 손에 쥐었다.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거예요.”
비는 점점 거세졌지만, 두 사람은 창가에 앉아 나란히 앉아 있었다.
비가 멈춘 뒤에는 새로운 선택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알면서도, 이번에는 함께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비가 그쳐도 괜찮아요.”
서하의 말에 현우는 조약돌을 꼭 쥐며 대답했다.
“우린 이번엔 멈추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