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기억을 잇는 비, 마음을 적시는 사랑 - 3장 -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서하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사무실 책상 위에는 마무리하지 못한 보고서와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 메모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에 고정되어 있었다.
‘또 여우비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서 조약돌을 꺼내 손에 쥐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는 순간,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비가 내리면 운명이 바뀐다.’
현우와 함께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운명은 이제 내 선택에 달려 있어.’
점심시간, 회사 근처 카페.
서하는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어딘가 멍해 보였다.
“또 비 생각해요?”
지은이 트레이에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서하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야?”
지은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 남자 생각하면서 비 오는 날만 기다리는 거 아니에요?”
서하는 지은의 농담에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냥… 이상하게 그날 이후로 비가 내리면 자꾸 생각이 나.”
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요? 그 남자랑은 잘 돼가요?”
서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겠어. 그냥… 아직은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아.”
“조금씩? 너답지 않게 너무 신중한 거 아니야? 평소엔 직진인데.”
지은의 말에 서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맞아. 난 원래 이렇게 조심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현우를 만난 이후, 그녀는 마음의 문을 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조심스러운 태도와 어딘가 상처를 숨기려는 듯한 모습이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이번엔 좀 달라. 무작정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지은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조심하다가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만 해.”
그날 저녁, 현우와의 재회.
서하는 퇴근 후 다시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현우는 이미 자리를 잡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기다리셨어요?”
현우는 고개를 들며 미소 지었다.
“아니요. 그냥 책 읽으면서 비 구경하고 있었어요.”
서하는 그의 말에 자리에 앉으며 조약돌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또 비가 오네요.”
현우는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이번엔 더 오래 갈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현우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요즘 글을 쓸 때마다 자꾸 비가 떠올라요. 그리고 그 비가 끝나는 순간, 새로운 시작이 나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서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멈추면 모든 게 다시 시작될 수도 있죠.”
그녀의 말에 현우는 조약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서하 씨는 이 조약돌이 뭔가 특별한 의미를 가질 거라고 믿나요?”
서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운명 같은 거, 요즘엔 믿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운명을 기다리는 것보다 선택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현우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미소 지었다.
“저도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비가 우리를 만나게 했지만, 그 이후는 우리의 선택인 것 같다고요.”
비는 여전히 창밖을 적시고 있었다.
서하는 조약돌을 내려다보며 손끝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현우와의 대화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처럼 자연스러웠다.
‘비가 아니었어도, 우린 만나게 되었을까?’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거야.’
비가 잠시 멈춘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현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가 멈추면 뭐가 달라질까요?”
서하는 그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더 확실해질 거예요.”
비가 잠시 멈춘 뒤,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서하는 창밖의 빗방울을 바라보며 조약돌을 손끝으로 굴렸다.
현우는 그런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 돌,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서하는 순간 멈칫했지만, 곧 차분히 대답했다.
“아주 어릴 때였어요. 여우비가 내리던 날. 누군가와 함께 개울가에서 주웠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 뭔가 약속을 했던 것 같아요.”
현우는 그녀의 말을 조용히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비슷한 기억이 있어요.”
서하는 그의 말에 놀라 눈을 들었다.
“기억나요? 그때 누가 있었는지?”
현우는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선명하지 않아요. 얼굴도 희미하고, 목소리도 흐릿해요. 하지만 이상하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때가 떠올라요.”
서하는 조약돌을 손에 꼭 쥐었다.
‘이 사람일지도 몰라. 그때의 소년이…’
그러나 확신하기에는 기억이 너무 흐릿했다.
“그 조약돌… 혹시 그때 주운 건가요?”
현우의 물음에 서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리고 그때 누군가에게 줬어요.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으면서.”
현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이 돌이 그때 우리를 연결해 준 걸까요?”
비가 점점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카페 안은 따뜻했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비에 젖은 기억을 닦아내듯 조심스러웠다.
“그때의 약속을 믿어요?”
서하의 질문에 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믿으려고 해요. 사실 지금 이 순간도 그 약속 덕분인 것 같으니까.”
서하는 그의 대답에 안도하면서도 두려움이 스쳤다.
‘이게 정말 운명이라면… 다시 사라지진 않겠지?’
서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 선택에 달렸네요.”
현우는 그녀의 말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요. 비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했지만, 그다음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거죠.”
그의 말은 이상하리만큼 서하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이제는 운명에 기대지 않아도 괜찮아.’
비가 잠시 멈췄다.
현우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서하 씨는 왜 그 돌을 계속 가지고 다녔어요?”
서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아마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의 기억도, 그때의 감정도.”
현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저도 그래요. 저도 그 기억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비가 내릴 때마다 그날을 떠올렸나 봐요.”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하는 조약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말했다.
“이제는 이 돌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이어주는 거라고 믿고 싶어요.”
현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은 선택이 더 중요하니까.”
서하는 조약돌을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미소 지었다.
“비가 그쳐도, 우린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거예요.”
비가 멈췄다.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서며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젖은 거리는 반짝이고 있었고, 공기에는 비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다시 비가 올까요?”
현우의 질문에 서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언젠가는요. 하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우린 괜찮아요.”
현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손을 내밀었다.
서하는 그 손을 잡으며 조약돌이 주머니 속에서 차가운 온기로 남아 있음을 느꼈다.
‘이젠 비가 없어도 괜찮아. 우린 서로의 선택을 믿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