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기억을 잇는 비, 마음을 적시는 사랑 - 2장 -
비는 그쳤지만, 도심 거리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
서하는 카페 문을 나서며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비가 멈췄다고 해서, 이 감정까지 멈출 필요는 없어.’
그녀는 마지막으로 창가에 앉아 있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현우… 이름이 현우였지.’
그의 얼굴은 여전히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서하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묘한 감정을 애써 눌렀다.
다음날 아침, 사무실.
서하는 책상에 앉아 전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지만, 머릿속은 자꾸만 그와의 대화로 돌아갔다.
‘물수제비… 그리고 조약돌.’
그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서하는 조약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돌렸다.
‘정말 같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우연일 뿐일까?’
“서하 씨, 오늘도 정신 없어요?”
서하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지은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어제 늦게까지 일했어요?”
서하는 커피를 받으며 웃었다.
“아니, 그냥 생각이 많았어요.”
지은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서하를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다.
“그런 표정은 보통 남자가 원인이던데?”
서하는 당황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냥… 어제 비 오는 날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났어요.”
지은의 눈이 반짝였다.
“뭔가 드라마틱한 전개 같은데?”
서하는 천천히 어제의 일을 이야기했다.
여우비가 내리던 날, 낯설면서도 익숙한 남자와의 대화.
그리고 조약돌에 얽힌 기억과 감정까지.
지은은 이야기를 듣고는 흥분한 듯 말했다.
“이건 운명이야! 여우비가 내리는 날 만났다면서? 그건 이미 신의 계시지.”
서하는 웃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복잡했다.
“운명일까? 아니면 그냥 우연일까?”
“운명이든 아니든 중요한 건 네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거야.”
그날 저녁, 서하는 카페 앞을 서성였다.
‘설마 오늘도 올까?’
그녀는 문을 열기 전, 조약돌을 주머니 속에서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날의 촉촉한 공기가 남아 있었다.
“또 만났네요.”
서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현우가 카페 안쪽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자주 오세요?”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서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어제 그 비가 좀 특별해서요. 괜히 다시 오고 싶더라고요.”
현우는 그녀의 손끝을 스치는 조약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돌, 아직 가지고 있네요.”
서하는 손을 움켜쥐었다.
“네. 손에 쥐고 있으면 마음이 좀 편해져서요.”
현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물수제비 이야기… 혹시 더 기억나는 거 없어요?”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긴 하는데… 흐릿해요. 꼭 꿈 같아요.”
현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도 그래요. 마치 어디선가 비슷한 순간을 겪었던 것 같은 기분이요.”
서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런 기억을 믿나요? 운명 같은 거.”
현우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어릴 때는 그런 걸 쉽게 믿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 비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했잖아요.”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창밖의 어둠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서하는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비가 없어도 괜찮아. 이건 시작일지도 몰라.’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서하는 여전히 비가 내렸던 날의 잔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카페 창가에 앉아 있는 현우의 모습도 그날의 풍경과 겹쳐졌다.
‘비가 내리면 운명이 바뀐다고 했지.’
그녀는 주머니 속 조약돌을 손끝으로 굴리며 그 말을 되뇌었다.
“무슨 생각해요?”
현우의 목소리에 서하는 놀라며 손을 멈췄다.
“그냥… 조약돌이요. 손에 쥐면 마음이 편안해져서요.”
그녀의 대답에 현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게 있죠. 특별한 의미가 담긴 물건은, 그냥 갖고 있기만 해도 안심되니까.”
서하는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우 씨한테도 그런 게 있어요?”
현우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한테는… 기억이에요.”
서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끔 아무런 전조도 없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어요. 개울가, 물수제비… 그리고 조약돌 같은 것들요.”
서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조약돌이요?”
현우는 그녀의 반응에 약간 놀란 듯 보였다.
“네. 어릴 때… 누군가와 그런 약속을 했던 것 같아요. 조약돌을 주고받으면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서하는 조약돌을 손끝으로 더 꼭 쥐었다.
‘이 사람이 그때의 소년일까?’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약속, 기억나요? 그때 누가 조약돌을 줬는지.”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잘 기억나지 않아요. 흐릿하고… 마치 꿈 같아서.”
서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그런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아요. 비가 내리는 날이면 떠오르긴 하는데…”
현우는 서하의 말을 조용히 듣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은 어둡고 고요했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더 깊어졌다.
“서하 씨는 그런 운명 같은 걸 믿어요?”
서하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예전엔 믿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현우는 웃었다.
“저도 그래요. 그래서 더 궁금한가 봐요.”
그의 눈빛은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느낌이었다.
그 순간, 서하는 주머니 속 조약돌을 내밀었다.
“이거… 만져볼래요?”
현우는 망설이다가 조약돌을 받았다.
그는 조약돌을 손에 쥐고 천천히 굴렸다.
“익숙하네요. 이상하리만큼.”
서하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정말 이 사람이 그때의 소년일지도 몰라.’
대화는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현우는 조약돌을 돌려주며 말했다.
“이 돌, 참 특별하네요.”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는… 과거와 연결되는 유일한 증거 같은 거예요.”
현우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물었다.
“그러면… 그 증거가 지금 우리를 연결시켜 준 걸까요?”
서하는 그의 말을 듣고 미소 지었다.
“비가 내린 덕분일지도 모르죠.”
현우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가 내리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 이제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서하는 그의 말에 마음이 울렸다.
“저도 그래요. 우연 같았던 게… 사실은 필연일지도 몰라요.”
밖은 여전히 비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더 깊어지고 있었다.
서하는 다시 조약돌을 손에 쥐며 속으로 되뇌었다.
‘비가 없어도 괜찮아. 이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
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약돌을 믿어요?”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약돌도, 그리고 여우비도요.”
창가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이미 다시 이어질 운명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