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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여우비 01화

운명을 적시는 비

"여우비" 기억을 잇는 비, 마음을 적시는 사랑 - 1장 -

by 소선

비가 내리면 운명이 바뀐다.

서하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준 이 말을 종종 떠올렸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비가 올 때마다 귓가를 맴돌았고, 여우비가 내리면 어김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가 내리던 날, 특별한 사람이 나타나곤 했지.”

어릴 때는 그 말이 마법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직장과 경쟁, 하루하루 쫓기는 삶에서 운명 같은 건 사치였다.

그러나 그날, 여우비는 다시 그녀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비는 예고 없이 쏟아졌다.

서하는 도심의 횡단보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는 얇은 막처럼 거리를 덮었고, 사람들은 우산을 펼치며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서하는 우산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우비…’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비와 함께 쏟아지는 풍경은 이상하리만큼 익숙했다.

‘왜 이 장면이 낯설지가 않을까.’


서하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카페의 간판이 보였다.

비에 젖은 간판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와 커피 향이 그녀를 감쌌다.

서하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창밖에는 여전히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 정말일까?’

어릴 때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서하는 손끝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에 닿았다.

‘조약돌…’

항상 가지고 다니던 작은 돌이었다.

그녀는 조약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굴렸다.

‘왜 이 돌을 계속 간직하고 있는 걸까.’

손끝에 느껴지는 돌의 감촉은 차가우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창밖으로 비를 바라보며 서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비가 조금씩 잦아들면서 공기는 더 촉촉해졌고,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자리 잡았다.

‘비가 내리는 날은 늘 뭔가 특별한 일이 생겼어.’

어릴 때 개울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며 뛰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여우비가 내렸었다.

그리고 그날, 누군가에게 조약돌을 건네며 했던 약속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기억이 안 나… 누구였을까?’


그때,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비에 젖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젖은 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하는 순간 눈을 떼지 못했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창가 쪽으로 걸어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아.’


“죄송한데 여기 앉아도 될까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서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 앉으며 젖은 재킷을 의자에 걸었다.

그 순간, 서하는 테이블 위의 조약돌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덮었다.

‘이 조약돌… 괜히 꺼내놨나.’


“비가 참 갑자기 내리네요.”

그가 가볍게 말을 건넸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게요. 여우비 치고는 꽤 오래 내리는 것 같아요.”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를 스치다가 조약돌에 멈췄다.

서하는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전에 뵌 적 있나요?”

그는 잠시 놀란 듯 서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기분이 드네요.”


창밖의 비가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이 두 사람의 모습 위로 겹쳐졌다.

서하는 손끝으로 조약돌을 가만히 쥐었다.

마치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이 어딘가에서 멈추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가 내리면 운명이 바뀐다.’

서하는 그 말을 떠올리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창밖의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서하는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을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조약돌을 다시 쥐었다.

‘이 조약돌을 처음 손에 쥐었던 날도 비가 내렸었지…’

그녀는 손끝으로 돌의 표면을 천천히 문질렀다.

작고 매끄러운 돌의 감촉이 낯익으면서도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특별한 돌인가 봐요.”

서하는 조약돌을 바라보던 남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아, 이거요?”

그녀는 순간 손을 움켜쥐었지만,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누군가에게 받았던 돌이에요. 그냥…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요.”


남자는 그녀의 말을 조용히 듣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 받은 거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되뇌었다.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시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다.

“혹시… 기억나요? 그게 언제였는지?”

서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이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잘 기억은 안 나요. 그냥… 비가 오는 날이었어요. 여우비가 내리던 날.”


남자의 시선이 다시 테이블 위로 돌아왔다.

그는 손끝으로 컵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비가 내리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서하는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 말… 분명 나도 했었어.’

기억의 조각들이 희미하게 떠오르려 했지만, 그 순간에는 흐릿하게 사라졌다.

“네… 어릴 때 들은 적이 있어요.”

그녀는 조약돌을 손에 꼭 쥐었다.

“믿어요? 그런 말.”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우연히 마주친다면… 그게 운명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서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이 사람… 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녀는 조약돌을 손바닥에 꼭 쥐었다.


카페 안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서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하죠. 오늘따라 이 비가 익숙하게 느껴져요.”

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

“저도 그래요. 비가 내리면 뭔가 달라질 것 같다는 느낌… 예전에도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서하는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조약돌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 개울가에서 누군가와 함께 돌을 주웠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혹시…”

서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릴 때 개울가에서 물수제비 뜬 적 있어요?”

남자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놀란 듯했다.

“물수제비요?”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있었던 것 같아요. 그날도 비가 내렸었는데.”


서하는 숨을 삼켰다.

조약돌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사람… 설마 그때의 소년일까?’

하지만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장면이 떠오르네요.”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날, 누군가 나한테 돌을 건넸어요. 이걸 가지고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요.”

서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했던 말인데.’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서하는 조약돌을 내려다보았다.

‘운명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말… 정말일까?’

창밖의 빗줄기가 흐릿하게 퍼져, 마치 시간과 공간이 엉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돌… 혹시 그런 약속을 기억나게 해주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 비가 다시 우리를 연결해 주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서하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비가 내리면 운명이 바뀐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말은 남자의 마음을 두드리는 듯했다.

“그럼 오늘은 그 운명이 시작되는 날일까요?”

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비는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하는 비가 멈추는 것이 아쉬웠다.

‘비가 멈추면… 이 감정도 사라질까?’

그녀는 조약돌을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야. 이번에는 멈추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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