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본 것
- 디어와 영화 <디어 헌터>
희교
큰아이가 학원과 집을 오갈 때 전동 킥보드를 탄 적이 있다. 학원까지 5분이면 갈 수 있는 기구가 생겨 다행이다 싶었다. 시간이 촉박할 때는 학원이 더 멀게 느껴지기도 했고 늦은 밤에는 오래 걸어와야 해서 걱정이 됐으니까. (물론 전동 킥보드를 타고 집과 학원만 오간 것은 절대 아니다.)
토요일이던 어느 하루 늦게 들어와서는 그림 그리는 내게 큰아이가 와서 뭘 해 달한다. 궁금한 게 많고 발랄한 고2 큰아이는 가끔 엉뚱한 것을 하고 싶어한다. 그날도 운전 면허가 있어야 한다기에 대신 등록해 주었다. 처음에는 전동 킥보드 이용 시 주의사항 안내가 오는데 ‘디어’라는 단어가 보여 순간 멈칫했다. 그 후 큰아이가 이용하고 나면 “디어 반납이 완료되었습니다”라고 문자가 왔다. 아 이 디어는......
‘디어’라는 단어를 보고 먼저 떠오른 건 영화 <디어 헌터>였으니까. 어릴 적 의미도 모르고 보았던 영화로, 한동안 미국 헐리우드 영화계를 풍미했던 배우들이 총출동한 작품이었다.
진짜 디어를 발견한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몇 만 년 만에 남편과 주말 아침 산책을 나갔던 지난 봄 어느 일요일, 인도 여기저기 서 있는 전동 킥보드에 ‘deer’라고 쓰인 글씨를 보았다. 노란색으로 예쁘고 동글동글한 서체로 잘 보이게 새겨져 있다.
말하자면 이 전동 킥보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전철역이나 사람 많이 모이거나 휙휙 빠르게 지나갈 법한 너른 곳에 서 있는 사슴을 하나씩 타고 떠나는 거다. 사슴은 도망 안 가고 이용하는 사람들 손에 얌전히 잡혀 있는 거고. 어디쯤까지 가면, 또 사람들이 세우면 그 자리에 사슴은 서 있게 된다.
디어는 일단 들으면 ‘dear’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영화 <디어 헌터>가 그랬듯이. 처음 <디어 헌터>라고 성우들이 영화 예고편에서 읽는 걸 들어서는 당연히 dear hunter일 것이라 믿게 된다. dear를 사냥하는 사람이라.... ‘안녕을 사냥해?’ 음 이 뜻이 맞나......
고1 정도 될 때까진 구경도 못 해 본 단어였던 deer. 늘 공부 잘해 나의 기를 죽이던 외사촌들이 <디어 헌터>의 뜻을 알아낸 험난한 과정을 얘기해 줄 때 “아하!”가 아니라 “으잉!?” 했기에 안 까먹는 단어다. 같은 궁금증으로 외사촌들도 출발했다면서 한겨울 외할머니 제사를 위해 외가에 모여 제사 준비하며 자정을 기다리다 짬짬이 따신 방에 모여서 수다 떨던 30년 전 그 밤, <디어 헌터>의 ‘디어’가 dear가 아닌 deer임을 알았으며 뜻은 숫사슴임을 알았다. 그러니 ‘디어 헌터’는 ‘사슴 사냥꾼’이라는 뜻이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1978년 영화 <디어 헌터>. 미국 펜실베니아 주 러시아 출신이 많은 한 소도시에서 제철소에 같이 다니는 젊은 친구들이 베트남전에 함께 나가게 된다. 떠나기 전 함께 사슴 사냥을 나가는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마이클(로버트 드니로 분)이 사슴 한 마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별 고민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시간이 흘러 베트남에 다녀와서 다시 사슴 사냥에 나서지만 예전과 같지 않다. 사슴에게 총구를 겨누고 회심의 한 방을 쏘지만 총알은 빗겨나간다. 사슴이 자유롭게 가도록 놔두는 장면은 이 영화의 전체 모티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친구 스티븐(존 세비지 분)의 결혼식에서 린다(메릴 스트립 분)에게 청혼했던 닉(크리스토퍼 월큰 분)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다. 베트공들에 의해 비인간적인 러시안 룰렛 게임에 끌려 나가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목숨은 건지지만 커다란 공포에 잠식되어 도박장으로 흘러들고 만다.
닉의 생사를 모르고 고향으로 돌아왔던 마이클은 스티븐의 계좌로 다달이 거액이 송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닉이 살아 있음을 직감하고 다시 베트남으로 가 도박장에서 영혼이 다 망가져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닉을 찾는다. 그때까지 불사조였던 닉은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마이클과 대면하고 마이클을 기억해 낸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결국 마이클의 품에서 목숨을 잃는다. 마이클은 오열하는데 어쩌면 마이클은 영화의 마지막에 사슴을 놓아 주며 닉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사슴은 닉처럼 죽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 영화에 전쟁 장면은 많이 안 나온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전쟁으로 받은 상처를 보듬고, 함께 전쟁의 위협을 뚫고 살아나오는 우정, 서로 위로하며 느끼는 사랑 등으로 영화 <디어 헌터>는 충분히 슬프다. 주제곡 <까바띠나>와 마지막에 흐르는 <God Bless America> 등의 음악으로 또한 충분히 아름답다. 어릴 때 본 탓에 사건과 감정을 제대로 따라가진 못하고 토막토막 장면만 머리에 남아 있었다. 어느 블로거가 친절하게 정리해 준 줄거리를 읽으니 다시 보는 것처럼 이야기와 감정이 연결되면서 슬픔만 남아 있던 내게 하나의 큰 맥락으로 새로운 감흥이 다가왔다.
그 시절 멋모르는 미국 젊은이들에게 베트남전은 사슴 잡으러 나가는 발걸음처럼 용기를 자랑하며 나가도록 부추겨지기도 했다고 한다. 대수롭지 않게 떠난 길에 마음이 다쳐 버린 닉과 다리를 다친 스티븐을 마이클이 바라보는 시선에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던지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을 것이다. 친구를 구하려 애쓰는 마이클의 절규는 어린 내가 봐도 눈물겨웠다. 전쟁은 참전한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과 친구를 모두 아픔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린다.
“디어 사용이 반납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는 날마다 두어 번씩 떴는데 그때마다 영화 <디어 헌터>의 히로인 린다와 린다의 약혼자이던 자신의 친구 닉을 생각해 늘 린다에게 정중하던 마이클의 사랑이 떠오른다. 물론 서로 위로 받지만 아픔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을 보면 아픔이 따라오는 걸 막을 수가 없으니까.
지금은 연락이 끊긴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무던히도 좋아하던 배우 두 분이기에 그 친구와 마주앉은 날이면 그 영화 얘기를 끝도 없이 들어야 했다. 나보다 조금은 성숙했던 친구는 미국 젊은이들에게 던져진 디어 헌터의 뜻과 베트남전의 의미를 알았으리라. (아마 디어 헌터의 뜻도 내게 여러 번 말했을 거다!) 풋풋하던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드니로와 그 친구들을 보며 영문도 모른 채 참전해 다쳐 돌아와야 했을 우리나라의 용사와 가족과 친구도 위로받게 되는 영화 <디어 헌터>.
가만히 디어 메시지를 본, 디어라는 이름의 전동 킥보드를 들여다보고 난 어느 아침의 감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