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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교 Sep 26. 2021

루리코의 방

가만히 들여다본 것

루리코의 방 

희교     



똑똑- 똑똑똑똑. 새벽 네 시 반이다. 놀라서 문을 여니 잠옷 바람의 모나가 서 있다.      

모나. 머나먼 땅 영국에서 만난 과 동기. 같은 대학원생 기숙사 3층에 묵는다. 아시아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친해져서 영어로 소통하지만 피차 사용하는 영어가 단순한 편이라 일어로 말해도 어떤 말일지 상상이 된다. 한 살 어리다. 늘 생기가 넘친다. 생머리가 찰랑거린다. 자주 놀란 눈이 된다.      


크리스마스 방학이 지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 1월 초, 바쁜 일정으로 며칠을 못 만나던 차다. 

“무슨 일이야, 모나?” 모나의 얼굴을 살핀다.

“미안해, 제이. 은근히 신경이 쓰이더니 요 며칠은 밤잠을 도통 못 잤어. 루리코가 나를 죽이려 해.” 눈이 퀭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다.

루리코. 모나보다 한두 살 어린 일본 교토에서 온 사회학 전공의 얌전해 보이는 대학원생. 오히려 우리의 전통 탈바가지를 연상케 하는 얼굴. 천천히 공손히 말하며 늘 깍듯하다.      


“12월 말 어느 날, 루리코가 칼을 빌려 달라기에 빌려 줬어. 근데 2주가 더 지나도록 안 돌려주는 거야. 며칠 전에는 본국으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가려고 거금 50파운드나 들여 구입했던 로라애슐리 꽃무늬 접시 알지, 그 접시가 어떤 날카로운 것에 찔려야만 생길 수 있는 금이 좍 가 있는 거야. 아침에 부엌에 들어갔다가 그 접시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걸. 칼은 계속 돌려받지 못하는 와중에 부엌에서 도무지 루리코는 만날 수가 없고. 한밤 12시 경이면 누군가 슬리퍼를 차르차르 끌고 와서 방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 사라지고 서성거리다 사라져. 며칠째 들리는 그 발소리는 분명 루리코야.”     


루리코는 어학연수 기간에 민박집에서 함께 묵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피터라는 학생에게서 고백을 받았다. 거절하기도 했고 본 학기가 곧바로 시작하여 기숙사로 들어오며 자연스레 헤어졌다. 뒤늦게 애초부터 자신도 좋아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만 외국인과의 연애가 집안에 야기할 문제가 걱정됐음을. 그 후 루리코는 기숙사 3층 방에서나 인근 타운으로 가는 버스에서 잔디밭에서 수다 떠는 애들이나 뒷좌석에 앉은 여학생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는다. “피터가 여전히 루리코를 좋아한대!”      


피터를 좋아하는 루리코의 마음이 점점 커져 갔다. 급기야 몇 주 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그 민박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갔으니 좋은 소식이 올 거라는 말도 모나는 내게 전해 주었다. 그런데 루리코가 모나를 죽이려 한다니!!     



열서넛이 함께 쓰는 기숙사의 부엌은 대표를 한 사람씩 두어 행정적으로 처리할 일이 생겼을 때 담당하도록 한다. 대표는 거의 한 명인데 모나 네 부엌은 부대표까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부대표가 한국인이었다.    부대표 언니의 번호를 들고 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전화 버튼을 누르는 손도 떨렸다. 한겨울 영국의 새벽 6시는 캄캄한데도 언니는 1층 내 방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모나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워했고 듣는 나나 언니는 점점 더 진지해져 갔다. 이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으니 말이다.      


“루리코가 들었다는 버스에서나 창 밖에서 남아공 학생이 자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어.” 지난 파티에서 밝혀졌단다. 피터는 지난여름 고백했다 차이던 날 말끔하게 마음을 정리했으며 두 번 다시는 루리코 얘기를 한 적 없음이.      

모나는 퀭한 눈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루리코는 헛것을 들었던 거야. 나한테 말했던 모든 게 다 환청에서 비롯된 망상이었던 거지. 그리고 일본에서는 칼을 누군가에게 준다는 건 당신 손에 내 목숨을 맡긴다는 뭐 그런 뜻이야, 제이.” 무슨 이런 이야기가 다 있나.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쓸쓸한 강, 종이에 수채 2021 Lydia


모나는 큰 눈으로 황망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고 언니와 나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창밖으로 조금씩 번지는 밝은 기운을 보고 있었다. 언니는 9시가 되자 모나를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해서 학교 상담 센터에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했고 다른 기숙사로 옮겨 지내게도 되었다.     


우리는 서로 전공이 소설과 시로 달라서 겹치는 수업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얼마 동안은 내 방문 앞에 붙여 두는 쪽지로만 연락을 취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상담을 받았다고 했다. 상담을 통해 모나가 한층 진정되었음은 물론이고 모나의 영어가 놀라우리만큼 향상되었다는 건 안 비밀이다. 계속 상담 받으라는 농까지 던졌을 정도다.     


모나가 좀 더 편해져서야 우리는 소중한 저녁 식탁에 마주앉을 수 있었다. 루리코는 이전부터 몇 가지 일로 부엌 대표가 지켜보던 차에 이번에 유학생 전담과를 통해 일본 집에 연락을 취했고 부활절 방학도 맞이하기 전에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제이, 루리코가 자란 교토라는 곳이 어떤지를 알면 조금은 더 이해할 거야.” 모나는 내가 미심쩍어하는 줄을 알아챘다. 

“무슨 말이야?” 

“너 말이야 제이. 이 일을 다 믿지는 않잖아. 교토는 전통적으로도 굉장히 보수적인 동네인데다가 루리코는 일본 교토 지역에서도 꽤 명망 있는 집안의 딸이어서 체면과 명예가 아주 중요한 집안이라고. 당연히 루리코는 이번 일로 자신이 웃음거리가 된다고 여겼을 거고 모든 걸 알고 있는 내가 가장 껄끄러웠을 거야.” 꽤나 논리적이고 단호했다. 루리코에게 자신의 치부를 모나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은 큰 수치였을 것이다.  

    

“루리코의 정신 상태는 아마 영국에 오기 전부터도 불안정했을 텐데 여기서 도화선이 되는 일을 만나 터져 나왔을 뿐이야.” 모나의 상담사가 루리코도 상담했는지는 25년이나 지난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모나가 들려 준 이야기는 아마도 상담사의 말이었을 거다.      



루리코의 방을 딱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침대 옆에 작은 등 하나만 켜진 채 값나가는 오디오를 통해 팝송 <I believe I can fly>가 흘렀다. 푹신한 이불에 붉은 색 담요가 덮인 방이 전체적으로 붉게 어두컴컴했다고 기억한다. 오랜 후에도 루리코를 떠올리면 그 붉고 어두컴컴하던 방이 따라오곤 했다. 늘 외롭고 쓸쓸했을 것만 같은 방, 아니 루리코.      


모나네 부엌엔 또 일본인이 들어왔다. 모나는 워낙 쾌활한지라 새로 들어온 일본인과 잘 지내면서도 살짝 거리를 두는 눈치였다. 칼 하나로 빚어진 소동은 칼 하나의 실제 크기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두려움이 되어 모나의 마음 속 어딘가에 남은 듯했다.      


솔직히 말하면 오랫동안 나는 이 일을 두고 정신력이 약한 이들의 이야기라고, 그리 쉽게 남이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여기다니. 너무나 얕은 철학을 지닌 사람들 아니냐고 가볍게 치부해 버렸다. 


내 아이 아직 어리던 시절, 우리나라에 놀러온 모나의 전화를 두어 번 못 받은 이후로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예전부터 서운했는지 일부러 전화를 안 받는다고 생각한 듯하다.      


차츰 알 수 있었다. 모나와 루리코가 내게 던진 질문은 ‘과연 그들은 왜 그리 생각했을까, 일본인이어서였을까’였다는 것을. 가족과의 유대에서 싹튼 튼튼한 마음을 가졌다면 조금 수치스럽고 서운해도 사정이 있겠거니 여기고 넘길 수 있었을 텐데. 답은 여전히 찾을 수 없지만 루리코는 어찌 되었을까 가끔 생각한다. 나중에라도 어둡게 붉은 방이 아니라 밝게 빛나는 방을 가졌을까. 부디 그랬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는 제가 기억하는 한 모두 사실이며 등장인물의 이름만 바꾸었음을 밝힙니다.)     


여명, 종이에 수채 2020 Ly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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