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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교 Sep 26. 2021

두 번의 밤

가만히 들여다본 것

두 번의 밤

희교          


손가락 끝을 종이에 베이면 말도 못하게 아프다. 살이 연한 부위라서 피도 처음엔 별로 안 나다가 사악 배어 나오는 붉은 색에 일단 놀라고 지혈하려면 한참을 입에 물거나 닦아내며 눌러 주어야 한다. 

똑같이 아픔을 많이 느끼는 부위가 하나 더 있는데 보통 다들 입 밖에 내지 않으려 하고 병원 가서 보이기 민망해 참고 참다 병을 키우게 된다. 오래 앉아 있거나 신경 쓰면 변비가 오거나 어릴 때부터 자주 변의를 참아온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병증. 바로바로 치질 말이다.      


내게는 이 고질병이 있다. 어려서부터 의자에 오래 앉고 변 보러 들어가서 오래 앉아 있어서. 그래도 결혼 전에는 피가 나거나 심하지 않아서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는데 임신을 하고서는 그리 되지 않았다. 은행 알만한 덩어리가 안 없어져서 처음 수술을 한 것은 큰애를 낳고 작은애를 낳기 전 서른여섯 살 때였다. 이 수술이 어떤지 아무 감이 없을 때라서 걱정 없이 수술에 임했는데 무통 주사를 맞아도 아파서 끙끙거리며 밤을 보내야 했다. 아니 보내던 중이었다.     

   

 


6인실. 병원의 새벽 다섯 시는 소란스럽다. 간호사가 혈압을 재고 소변 통이나 수액을 확인한다며 오가는 소리로 시작한다. 아파서 잠을 설치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살며시 잠들었던 나를 깨운 건 나를 가운데 두고 양쪽 침대에 계시던 아주머니 두 분이 주고받은 수다였다. 나보다 하루, 이틀 먼저 입원하셨던가, 나랑 종류가 다른 병이었나 이제 기억이 안 나지만 두 분은 거동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새벽부터 세수를 깨끗하게 하고 오더니 바리바리 싸온 화장품을 각자의 이불에 우르르 쏟아놓고는 화장을 시작했다.     

내가 가운데 있으니 두 분의 말은 나를 넘어야만 서로에게 전달되는 거였다. 화장을 공들여 하면서 수다도 공들여 했다. 치질 수술을 마친 뒤라 바른 자세이긴 해도 엉거주춤 누워 있던 난데, 잠은 이미 다 잔 셈이었다.     

달그락거리며 화장품 찾는 소리, 파운데이션 탁 덮는 소리, 뚜껑 돌려 여는 소리 등등 다양한 소리로 화장하는 순서를 예측할 수 있었다.      

“작은아이가 요 옆 달빛마을에 살아. 그래서 여기로 이사 온 거지.” 연신 화장품을 달그락거리며 뒤적였다.

“아 어제 왔던 그 아들이요?” 크림 통에서 크림을 조금 찍어냈다.

“응! 손주가 모두 다섯이라우!” 립스틱 뚜껑을 열어 색을 확인하고는 다시 닫았다.

“아유 좋으시겠네! 우리 막내딸은 요 옆에 살아요. 이따 올 거예요.” 손거울을 한 손에 들고 파운데이션을 고르게 펴 바르며 입도 빠르게 움직이다 나를 슬쩍 봤다.     

“젊은 애기엄마는 어디 수술 받아 왔어요? 치질 수술인가. 많이 아픈가 본데.” 나에게도 발 빠르게 질문을 던지더니 손으로 빗을 잡고 머리를 빗었다.     

“아, 네.” 살짝 웃으며 대답을 던졌다. 저는 좀 푹 쉬고 싶다고요.

“애기엄마 아이 하나 낳았수?” 아이 낳아 본 사람은 딱 보면 안다 이건가.

“네.” 하나밖에 안 낳을 거예요.

“몇 살에? 그리 어려 보이지는 않는데.” 내 얼굴은 언제 보셨대.

“네, 좀 늦었어요.” 내 얼굴이 그리 늙어 보이나.

“늦더라도 얼른얼른 둘째 낳아요. 그럼 다 따라잡는 거라우.” 암요 다들 그 소리 해요.

“아, 예.” 하나도 힘들어 죽겠거든요.

“아이는 그럼 지금 누가 봐주고?” 누군 누굴까요.

“시어머니가 올라오셨어요. 내일은 주말이니 남편이 볼 거고요.”      

그날 그분들은 퇴원을 하시는 거였는지도 이제는 희미하지만 그 난리법석을 새벽부터 하셨어야 하나 싶은 생각은 지금까지 있다. 두 분은 화장도 열심히 하셨거니와 입심도 좋아서 사실 수다를 듣고 있으려니 아픈 줄 몰랐고, 가끔 내게로 수다의 핵을 돌려 물을라치면 질문 헤아려 대답하느라 아픈 걸 까먹었다.     

“기미가 올라와서 레몬을 많이 먹었어요. 그랬더니 손에 온통 레몬 냄새만 몇 년을 가더라고. 이젠 레몬을 안 사도 얼굴 한 번만 쓰다듬으면 레몬 기가 얼굴에 스며들 정도야.” 깔깔깔깔.     

“아래윗집하고 잘 지내면 떡이 서말 생길지 몰라도 하고픈 말 참느라고 변비도 생기지.” 끽끽끽끽.     

얘기가 흘러갈 곳 정하지 않아 두서없다 싶기도 했지만 듣고 있으면 웃음이 피식피식 나서인가 귀 쫑긋하고 듣게 되었다. 두 분의 재치 있는 입담에 새록새록 빠져들었다. ‘하루의 시작은 화장부터!’라는 슬로건이 딱 어울리는 두 분이었다.     


당황 종이에 수채 2021  Lydia


재치 넘치는 아지매들의 수다를 좋아하는 나. 집안 행사로 고향에 모이면 큰 방 하나에 길게 한 줄로 눕거나 두 줄로 여기저기 포개져 누워 자던 집안 아지매들과 나이든 새언니들과 나 같은 딸과 젊은 며느리들.      

새벽부터 일어나서 수다 떨며 분주하게 움직여 그렇게 화장을 공들여 하던 집안 아지매들의 모습을 옆 침대 아주머니들에게 얹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퇴원하고 나와 두 달 만에 작은 애를 가지고야 말았다. 아지매들의 수다는 진리만을 다룬다!     


15년이 지나고 나는 다시 똥꼬에 이상이 생겼고 미련하게 뽀대고 있다가 병원을 찾게 되었다.     

“뭐 하루 입원하면 되겠어요. 고름이 흐르는 관이 생겨 있는데 그걸 막아 주면 돼요.”     

큰 수술 아니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안심이 되어서인가, 날을 받아와서 기다리는 며칠 동안 옛 일이 떠오르며 혹시 젊은 사람과 한 입원실에 묵게 될지도 모르겠다 싶고, 그럼 나는 어떤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기대도 생겼다.      


와서 보니 이곳은 관록 있는 베테랑 의사의 개인병원이라 1인실 아니면 2인실뿐이고 아무래도 1인실이 편할 거라는 간호사들 말에 따라 1인실을 택하면서 내심 살짝 아쉬웠다. 재미있는 옆 침대 동료를 만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말이다.     

수술 끝나고 나와서 어벙벙하게 있는데 간호사가 와서 일러 준다.

“웬만하면 오늘 하루는 움직이지 마세요. 머리를 들면 내일 머리가 많이 아프실 수 있어요. 첫 소변을 보기 전까지는 물도 많이 마시지 마시고요!” 주의사항을 전하고 간호사가 나가자 차츰 마취가 깨며 아픈 똥꼬로 온 정신이 가 있는 통에 어수선한 소음이 옆방에서 오고 있음을 천천히 알게 되었다.


큰소리로 전화통화를 하고, “어, 내일 낮에 점심 때 보자고!” 

친구가 찾아오고, “오늘 회의는 어떻게 됐어?” 

무언가 매캐한 냄새가 훅 내 입원실로 들어오고, 창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간호사가 담배 피웠냐고 묻고, 아니라고 발 빼고, 그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듯했다. 바로 누워 아픔을 참고 있으려니 옆방 환자가 떠드는 소리가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두 아이의 온라인 수업과 등교 수업이 엇갈리는 통에 겨우 급하게 수술 날을 잡은 터라 친구들이랑 후배들 그리고 동네 아줌마들에게 병원에 있음을 뒤늦게 알리는 통화를 이어나갔다. 나 역시 옆방 환자랑 다르지 않은, 시끌벅적한 오후를 보냈다.     

옆방 환자가 담배를 피우면 낮에는 내 방으로 연기가 확 들어왔는데 일단 한 번 맡은 연기라서 둔해졌는지 잘 못 느꼈지만 저녁에 간호사가 내 방에 들어오더니,

“아유 이거 봐, 담배 피우셨네! 잠시만요!”하며 옆방 환자에게 갔다.

“담배 피우지 마세요! 아니 자꾸 이러실 거면 담배를 내놓으세요!” 라고 야무지게 말했다.     

“안 피웠어요.” 여러 번 오리발을 내민 참이었다.

“아니, 안 피우시긴 뭘 안 피우셔요?” 간호사가 따졌다.

“복도로 다 나온다니까요. 나와 보세요. 냄새 다 나잖아요! 입원실 창 열어 그 안에 냄새만 빠지면 된다 생각하세요?”라며 세게 나가니 그제야 담배를 내주는 모양이었다.     


간호사는 10시가 되기 전에 입원실을 돌며 많이 아프지는 않은지 물어보았다. 내일 퇴원할 때 가져갈 약을 주었고, 퇴원 뒤 주의사항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옆방 환자도 꽤나 오래, 여러 번에 걸쳐 간호사와 환담을 나누는가 싶더니 곧 무슨 소린가 울렸다. 

소리는 벽을 타고 요동치며 울려 넘어왔다. 코 고는 소리였다. 아, 참 여러 가지다. 낮에 친구가 와서 같이 담배를 피우고서도 안 피웠다고 간호사한테 큰소리칠 때도 우스웠는데 코 골며 자다가 또 깨서는 한참 노는 소리도 들렸다. 1인실을 써도 꽤나 다이나믹한 상황을 겪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시려는가 보았다.     


병원에서의 두 번째 밤이 이렇게 깊어갔다. 첫 번째 밤과 비슷한 추억을 하나 쌓으려나 기대하며 나도 화장품을 그러모아 볼까 작정도 했었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돌이켜보니 이번은 재미있는 옆방 환자를 만날 대목이었던 거다. 아픔도 잊고 심심하지 않게 낮과 밤을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      

치질로 수술 받으며 보낸 두 번의 밤 이야기였다. 덕분에 나는 요 근래 몇 년 중 가장 깨끗한 똥꼬를 가진 몸이 되었다. 고로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옆방 환자라도 얼마든 봐줄 수 있었던 것이다.      


위로 종이에 수채 2021 Ly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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