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은 후에는 드라마와 영화를 멀리 밀쳐두고 살았다. 시간 맞춰 텔레비전 앞에 앉기 위해선 누군가 아이를 두 시간 넘게 봐줘야만 했으니까. 반면 책은 둘째가 낮잠을 자던 나이까지는 쉬이 가까이 할 수 있었다. 그림책을 읽어 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노래를 불러 주며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려 내 책을 붙들 수 있었으니까. 아이들을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야 하던 시절에는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큰아이가 드라마를 보는 나이가 되면서 어깨 너머로 아이가 보는 드라마 제목을 물어보곤 했다. 간혹 본방 사수를 위해 아이가 마루에 나와 드라마를 보는 날이면 오다가다 조금 더 길게 볼 수 있었다. 작년 코로나 사태로 거리두기가 한창일 때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꺼리가 필요해지면서 다시 드라마와 영화의 세계로 돌아왔을 때 아이 덕에 맛만 보았던 드라마와 영화를 하나둘 찾아보기 시작했다.
<뷰티 인사이드> <디어마이프렌즈> <나의 아저씨> <비밀의 숲 1,2> <모두의 거짓말> <보보경심 려 달의 연인> 등등 많이도 보았다. 드라마 정주행을 작년과 올해처럼 많이 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이름만 들었지 실제 연기를 본 적이 없는 배우들도 많아서 새로운 이름을 메모해서 머릿속에 꼬깃꼬깃 넣어 두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연기 잘하는 이들을 보는 즐거움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었다.
이전까지는 크게 호감이지 않았던 배우도 있던 터라 안 보았더라면 얼마나 큰 손해였을까 싶기도 했다. 베스트로 꼽을 수 있는 드라마가 아주 많지만 8월 15일 광복절을 지나며 독립운동과 관련한 소재인 드라마 두 편과 그 드라마와 한자리에 놓이면 너무도 잘 어울릴 소설 한 편을 모아 보았다.
<시카고 타자기 중 타자기 가게 앞의 휘영과 율> 종이에 펜 2020 Lydia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는 전생과 현세를 오가는 이야기다. 전생에서 서휘영(유아인 분)은 독립운동 단체의 수장으로 정체를 숨기며 가난한 글쟁이로 산다. 저격수 류수현(임수정 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자신도 좋아하지만 전혀 티내지 않을 뿐 아니라 류수현의 마음을 내치기까지 한다. 신율(고경표 분)은 이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는 부잣집 아들로 어릴 때부터 봐온 류수현을 귀여워하며 좋아한다. 서휘영과는 달리 신율은 사랑을 택한다.
마음 놓고 사랑하지 못한 세 명의 젊은 독립투사가 다시 현생에서 만나게 된다. 현세에서 서휘영은 유명 작가 한세주로 다시 태어나 그들의 못 다한 이야기를 글로 완성하는 임무를 맡는다. 신율은 구천을 떠도는 유령작가 유진오로 나와 한세주 주변을 맴돌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라고 한세주를 설득한다. 한편 류수현은 작가 한세주를 좋아하는 팬, 전설로 등장한다.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는 사랑보다는 나라의 독립이 우선이던 난세에 자진하여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다. 어쩌면 그들의 희생 덕에 빼앗긴 나라에서 살지 않게 된 지금의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그 시절의 청춘들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떨궈 놓았던 떡밥을 거둬들이기 시작하는 중반부터는 예상 밖의 전개와 배신자 찾기 등으로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재미있는데 많이들 초반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듯하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드라마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불시에 튀어나오는 유머 코드와 유아인을 포함한 배우들의 호연에다가 주옥같은 음악 특히 SG워너비의 노래 <우리의 얘기를 쓰겠소>가 가슴을 적신다.
소설 『체공녀 강주룡』은 박서련 작가의 작품으로, 조선 최초 고공체류 노동운동가 강주룡의 일대기를 담았다. 일제의 조선 탄압이 심해질 때, 당시로는 과년한 주룡이 살림이라곤 볼 거 없는 집안의 나이 어린 남편에게 시집간다. 남편은 독립운동에 마음을 두고 있지만 갓 혼인한 부부가 정이 없지 않아 어린 남편이 아내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녀자에게 글 안 가르치던 시대에 어린 남편이 아내에게 글을 가르친다. 어린 남편의 마음을 알게 된 주룡이 남편과 뜻을 함께하는 마음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독립된 조선에서 사는 것을 보고 싶어서'였다.
주룡이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 캠프에 합류하여 보내는 길지도 않은 시간, 야무진 주룡에게 캠프 지도자가 보내는 기대와 업무 수행으로 다른 사람들이 수군수군 떠들어 대는 소리에 시달리다 결국 홀로 돌아서 나오게 된다. 사정상 친정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주룡은 평양으로 흘러들어 섬유직공이 되어 노동운동을 하게 된다. 주룡은 나이 어리지만 주장이 확실하고 주춤거리지 않아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 현장에서 기죽지 않는다. 결국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부르짖으며 평양 을밀대에 올라 농성을 벌이다 스러져 간다.
어떤 마음이면 사랑하는 사람이 이루고 싶은 세상에 자신도 한몫 거들고 싶을까. 이기적이어서인가 나로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설정이기도 했지만 나이 어린 주룡의 당참은 책을 보는 내내 응원을 보내게 만든다. 박서련 작가가 그려낸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은 인물 강주룡에 매혹되어 줄거리를 놓칠세라 손에서 놓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평양에서 만나는 노동운동가와 주룡의 로맨스를 한 번 더 기대해 보았는데 무산되어 아쉽지만 믿음을 나누는 동지로 그려지는 결말에는 두 손 들어 환영해 주었다. 나라는 풍전등화일진대 사랑에 목숨 거는 한가로운 이야기가 아니어서 말이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조선이라는 나라와 양반의 횡포에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간 노비의 아들, 유진 초이(이병헌 분)를 한 축으로 하는 이야기다. 조선 독립 투쟁에 헌신하는 양반가 여식 고애신(김태리 분)이 또 하나의 중요한 한 축. 고애신은 조선을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어린 나이에 달려드는 격이라면 유진 초이는 미국에 가서 획득한 미 해병대 대위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느긋하게 조선을 바라보며 위험에 처하는 고애신을 번번이 지킨다.
대사 하나하나가 놓칠 수 없는 명대사들이지만 이병헌과 유연석 그리고 변요한의 티키타카가 웃음 유발하는 장면으로 꽤 볼 만하다. 거기에다가 이병헌과 김태리가 나누는 대화는 운을 맞추는 놀이도 하고 때론 실갱이를 벌이듯 시소를 타며 긴장과 로맨스를 적절히 버무려 놓아 흥미진진하다. 고애신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행랑아범과 함안댁이나 유진 초이 옆에서 생각이 많은 조력자 통역관 등 등장인물들 간의 끈끈한 정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간 의병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어 가슴 벅찼다.
<미스터 션샤인 중 경사진 처마> 종이에 수채 2021 Lydia
강주룡과 유진 초이 모두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불바다에 뛰어든다. 예상보다 쉽게 저물어 이 사람 저 사람 누구나 팔아 버리려 팔을 걷어붙이던 조선을 잠시라도 더 붙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사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말이다. <시카고 타자기>의 류수현과 서휘영이나 신율은 어쩌면 더 큰 범주의 ‘사랑하는 사람’이 독립된 조선에서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당신은 조선을 지키시오. 나는 그런 당신을 지킬 테니.” 같은 말을 하면서. 연애가 나라보다 먼저일 수 없었던 때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사랑을 보내면서 다음 생에는 “내가 먼저 너를 알아보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젊은 나이의 독립투사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 나라 저 나라의 손을 타 그 손때 다 털어내지 못한 채이긴 해도 열사와 의인들이 이 땅에서 하루라도 살고 싶어했을 바로 그 ‘독립된’ 나라다. 이 나라를 잘 지키고 닦을 몫은 우리에게 넘겨졌다. 흔들리며 자라는 나무라 해도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에도 잘 자라는지 들여다보고 살펴 주어야 하지 않나. 엉망이 되어가는 듯해 보여도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빼앗겼다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의 나라를 빼앗기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