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교 Oct 03. 2021

나는 하고재비로소이다

가만히 들여다본 것들

나는 하고재비로소이다

희교


욕심도 원래 많은데다 아마 요 몇 년은 욕심을 더 내기도 했다. 일주일에 하루 쉬기는 했나 싶을 만큼 빼곡하게 일정을 채웠으니까. 쉬는 날도 월례 봉사 모임이 있거나 엄마 아부지가 가까이 계실 때는 뵈러 가거나 해야 했다.


일주일에 삼 일 수업을 할 때는 그나마 더 정신이 없었을 텐데 일 년쯤 끌었을 거다. 이틀 수업으로 다시 바꾸자는 말을 꺼냈을 때는 이러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으로 목까지 차올랐을 때였고.


얼마 전 온라인 글쓰기를 100일 동안 함께하던 분 글 제목에 '하고재비'라는 정겨운 단어가 들어 있었다. 글은 안 읽었지만 '하고재비'라는 말은 어릴 때 하도 들어놔서 딱 꽂혔다. 나는 이에 관해 할 말이 많다.


오빠들이 젖먹이이던 내게 잘 치던 장난은 누워 버둥거리는 내 주위로 모여들어 안 씻은 손가락을 입 가로 대면 입을 오물거리니까 오물거리게 했고 (쪽쪽 빨게 했다는 표현이 맞다!) 조그맣고 시꺼먼 곰인지 강아지인지 인형이 있었는데 들어서 보여주면 자지러지게 우는 거 재밌다고 세 오빠들이 다 나를 울리곤 했다. (내 성질은 오빠들이 다 버려 놓은 게 틀림 없다!)


아무튼 놀리기나 좋아하는 오빠들 틈에 내가 자라려니 뭘 툭툭 만지려거나 입에 넣으려고 하면 곱게 허용됐을 리가 없다. 못 하게 하고 못 가게 붙잡았을 게 뻔하지. 나는 점점 더 하고 싶은 게 많아지고 가고 싶은 데가 많아졌을 거다. 자꾸 못 하게 하니까!


초등학생 때 합창반을 내내 해서 연말 학예회에서는 독창 주자였다. 몇 년 전 다시 만났던 초등 동창이 내게 이런 말을 해주어 놀랐다. "담임 선생님이 그때 노래는 화진이 너 하는 거처럼 불러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라고. 아부지가 노래를 잘하시고 좋아하시는데다가 큰오빠도 엄마도 노래를 흥얼거리고 듣기도 좋아하는 집안 분위기여서 그 덕을 많이 보았을 거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집에서는 자꾸 뭘 못 하게만 하니 나가서는 뭐든 하고 싶고 나서고 싶어하는 하고재비가 된 거 아닐까.


중학생이 되어 만난 영어 선생님은 새로운 과 들어가면 교과서 본문을 외어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나는 매일같이 테이프를 들어가며 외어서 시험을 보면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맞곤 했다, 3년 내내. 이건 식구 누구도 하라고 하지 않은 거다. 하라는 건 없으니 그리 살다가는 하나도 못 하다 다 자라 버릴 거 같았나?


고등학교에 가서는 영어연극반에 들어갔다. 연말이면 축제 프로그램에 연극을 올려야 하니 미리부터 연습에 들어갔다. 오디션도 하고 추천을 하기도 해서 배역을 정하는데 연기라는 게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대사를 붙들고 주고받다 보니 어느 날 선배들이 "그렇지 바로 그거야, 거기서 감정을 좀더 폭발시켜 봐" 하는 말을 들으며 연기에 재미를 느꼈다.


학기 중에는 토요일에 늦게까지 연습을 해야 했고. 9시나 10시에 마치면 오빠들 한둘이 교문 건너편 전봇대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다들 친구들이랑 어울려 집에 가는데 말이다!! 오빠들인들 좋아서 나왔겠냐만서도.)


대학교에 가서는 노래패에 들어갔다. 학생운동의 끝물 무렵이긴 해도 광주항쟁이 아직 어제 일처럼 생생하던 때라서 부모님의 걱정은 크고 동아리 멤버들의 열의는 어마어마했다. 역시 여기도 공연을 올려야 했으므로 연습을 하다가는 술 한 잔이라도 걸치기 일쑤였고 그런 날이 지속되자 하도 집에서 늦게 들어온다고 지청구를 해대서 넉 달만에 관두고 학과 학생회나 외부 동아리로 눈을 돌려 다른 걸 찾았으니 과 학회 문학반이었다.


집에 쌓여 있는 책들은 이미 넘치고 넘쳤으나 소설이나 조금 읽었지 문학이라는 거에 큰 관심이 없었다. 아마 이 같은 기회가 안 왔다면 시라는 걸 내 손으로 펼쳐보거나 쓰지 않았으리라. 2학년 때 이 활동을 시작하고서 3학년부터는 국문과 부전공을 선택해 전공이었던 영문과 과정보다 더 열심히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해냈다.


아부지 엄마는 이미 내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나를 두고 저 하고재비 하고재비 하며 집에 붙어 있지를 않는다고 혀를 끌끌 차셨다.


하고재비는 야단치거나 박 주는 어감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엄마나 아부지나 두 분 모두 정이 많으시고 나를 귀여워하시는 분들이라서. 다만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지면 세상 걱정이란 걱정은 다  싸안고 사시는 분들이니 야단야단이 났었다. 나는 그 야단 듣는 게 싫어서 그냥 집어치우곤 했고.


커서 진로를 정할 때도 나는 느긋하게 시간을 쓸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이셔서 몇 달 끌어보다가 결국은 취직을 했었다. 신이 도우셨는지 하고재비 근성이 살아서인지 회사를 다니면서 준비한 영어 시험도 그렇고 이후의 준비도 신의 한수라 믿어질 만큼 일이 술술 풀려 나갔다. 아버지가  학기 시작 보름 남겨 놓고 유학을 허락을 하신 것만 봐도 그렇다. 하고재비를 누르려고 해서 빚어지는 부작용일 거라고는 아부지가 짐작도 못하셨을 거다.


결혼하고는 뭐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에 가만 있을 리 없다. 큰애에게 읽어주기 시작한 프뢰벨 테마동화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책 몇 권을 택해 영어 원서를 찾아 구매해서 읽어주기 시작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아 맨땅에 헤딩하기로 책의 판권에서 원제목을 찾고 영국이나 미국 아마존에서 찾아 낯선 결제 시스템에 손을 달달 떨어가며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해서 책을 주문했다.


하루 거의 18시간을 애하고만 지내니 이 하고재비 근성이 또 발동해 주신 거다. 토굴처럼 5층짜리 오래된 아파트 1층에 쳐박혀 지내며 노산으로 체력이 안 받쳐 줘 어디 자주 나가지도 못하던 때 우리말로 된 책들도 미리 읽어 줄거리를 파악해 두고는 읽어 주었다.


큰애를 업거나 작은애가 태어나 젖 먹일 때도 큰애에게 내 옆으로 와서 왼쪽 오른쪽 방향 바꿔 앉으라고 시키며 책을 읽어 주었다. (이 방식은 어디선가 읽은 건 아니지만 큰애가 말이 늦게 트이고 혼자 안 있으려고 해서 짜낸 궁여지책이었던 셈인데 나름 좋은 결과를 냈다. 작은애는 말이 늦게 트이지 않았고 큰애는 요 몇 년 간 폭발적으로 쌓인 어휘량과 상상력 계발 덕인지 학교 수행평가에서는 거의 점수를 깎이지 않는다.)


먼 길 공부하러 가는 것도 하고재비여서 기회가 찾아오고 아이들과 안 떨어지고 내 손으로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영어 원서 찾아가며 익힌 감으로 집에서 수업을 10년 넘게 했던 것도 하고재비여서 가능했던 듯하다.


아무래도 이렇게 쓰고 보니 내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도 하고재비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옳을 듯하다. 누가 하라고 시켰더라면 했을 건가 말이다. 내가 하고 싶으니 했지.  


나도 애들 어릴 때 만지려는 거 밟으려는 거 다 해보게 안 했다는 기억이 스물스물 다가와 두렵게 한다. 내 아이들은 또 얼마나 하고재비일 것인가 말이다. 아니 지금도 충분히 보여주고 있을 게다.


큰애는 하라는 공부는 작년 1학기로 저산 저건너로 보내고 드라마 삼매경이시다가 요새 와서야 다시 공부하시고 작은애는 공부는 절대 안 한다는 일념으로 그림 그리고 계시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작은애 전과목 과외를 시전 중이시다! 나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그리기 기본을 익히기 위해 여기저기 끊이지 않고 기웃거린다. 지금은 Painting the Wilderness 10 Day Challenge를 시작했고 말이다.


이상 하고재비 가문의 하고재비 이야기였다.





Painting the Wilderness Challenge 첫 그림 24×32 종이에 수채 2021 Lydia
이전 06화 귀찮은 아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