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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교 Oct 20. 2021

귀찮은 아이

내가 그리는 이유

귀찮은 아이

희교


그림책 중에 <귀찮은 아이>라고 있다. 다들 바쁜 식구들 사이에서 누구도 반겨 주지 않는 막내 꼬마가 집을 나가고 뒤늦게 아이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오빠가 여동생을 찾으러 나간다는 이야기다. 아이들 어릴 때 처음 읽어 주던 날 그만 울어 버렸다.

무언지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나를 건드리는 무엇이 있었다. 내 기억이 나만의 기억이라 다를 수 있다쳐도 내 느낌은  틀릴 수 없을 터였다.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좀 말괄량이다. 막내딸로 귀여움도 받았고 천덕꾸러기 취급도 받았다. 장난을 많이 치던 오빠들은 내가 무언가 만지려고 하면 만지게 두지 않고 무언가 하려고 하면 하도록 두지 않았을 거다. 집에서 가만히 있기를 요구 받던 나는 불뚝불뚝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터뜨려야 했을 거다.


무엇이 시작이었을까. 그건 니 꺼 아니다. 오빠들 주려고 놔둔 거다. 건드리지 마라. 이 세 문장을 자라는 동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냉장고에 들어 있던 큰오빠 몫의 포도를 냉장고 문 열 때마다 한 알씩 따먹어서 절반밖에 안 남아 있었다고 지금도 아무 것도 모르는 큰오빠가 놀린다. 뭐든 자기 몫이 챙겨지던 맏아들은 엄마가 얼마나 피나게 먹성 좋은 두 아들로부터 큰아들 몫을 방어하는지 모를 것이므로. 그 사이에 어린 막내가 포도 한 알 더 먹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도.


남아 있는 것들 56×76 종이에수채 2021 리디아


처음 장만한 집으로 엄마 아버지를 초대해 밥을 한 끼 차려 드렸다. 아직 아이들 어리고 덥고 습한 날 혼자 바쁘게 상을 차리고 겨우 앉았더니 미역국인지 대구전인지가 싱겁다 싱겁다고 아버지가 자꾸 타령 하신다. 간장 갖다드려요 아부지. 그거 아부지 드시라고 끓인 거 아니에요. 애들이 국이 있어야 밥을 먹어서 애들 입맛에 맞게 끓인 거예요. 하는 말이 스르르 나왔다.


나중에 그 말을 들은 이웃들은 아버지 서운하셨겠다고 입을 모았다. 나는, 귀찮은 아이였던 나는 매일같이 들은 말이었는데 말이다. 나를 위한 것은, 오롯이 나를 위한 것은 우리집엔 없었는데 말이다.


육아 지침에는 설거지 중에도 아이가 와서 이야기 들어 달라고 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들어 주라는 항목이 있었다. 그때 내가 하던 설거지보다 중한 일이 있을까. 얼른 끝내야 다른 일을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내 아이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네가 중하다는 인식을 품고 자라도록 해 주라니 쉽지 않았다. 자라며 받지 않은 사랑을 자식에게 주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말이다.


어릴 때, 밤 늦게 들어오시던 아버지 손에는 나를 위한 치킨이 종종 들려 있었다. 그렇게라도 내 편을 들어 주던 아버지가 지방 근무 발령으로 저녁 시간에 퇴근하지 않으시던 첫 월요일이 지금까지도 기억이 난다. 안방 아랫목이 비고 아버지가 출근하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던 아침의 낯선 고요와도 싸워야 했다.


바라는 사랑과 응원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며 차츰 집과 거리를 두었다, 마치 자취하는 것처럼. 내 손으로 내 빨래와 청소를 하고 학비만 받고 과외를 하며 용돈을 충당했다. 집에 신세지기 싫었다 늘. 내가 무얼 하든 모두가 귀찮아 하고 관심도 없으니 그저 신경 안 쓰게 혼자 해결하고 싶었고 거의 그렇게 지냈다. 그런데도 반대는 참 끝도 없이 이어졌다.


취직해 모은 자금으로 모두가 반대하던 유학을 계획하고 우리나라를 떠난다. 누구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을 곳에 있게 된 것이다. 하늘을 날아갈 듯 기뻤고 그곳에서의 1년을 축복처럼 누렸다.

한 번은 망설이다 빼고 온 책이랑 씨디 몇 개를 집에 부탁했는데 딱 내가 요청한 물품 열 가지만 있었다. 나라 밖에 나가면 모든 게 비싼데 과자 한 봉다리 라면 하나가 더 없었다. 어떻게 멀리 떠나온 내게 다들 이렇게 하는가.


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만 많고 내가 해 달라는 건 귀찮아들 했을까. 친구들과 분식도 사먹지 말고 동아리 활동도 하지 말아야 했다. 학과 수업이 끝나면 기계처럼 집에 가 있어야 했다. 엄마가 하는 집안일은 다 거들어야 했고 친구들은 다 시내에 나가 노는 명절 전날도 집에 쳐박혀 있어야 했다. 여성스런 딸을 키우고 싶었던 엄마의 핀잔과 원망에 더해 아버지의 간섭을 끝도없이 들었다.


문득 요새 엄마가 전화를 하면 나한테 제일 먼저 건다는 말을 곱씹어 본다. 나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이리라. 이제 와서 소홀했던 막내에게 미안한 걸까. 힘없었던 엄마와 벗어나려고만 하던 나는 서로 지켜 주지 못한 미안함이 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오빠들은 내 귀가가 늦으면 데리러 가야 하고 뭘 시작해 놓고 낑낑거리면 마무리를 해줘야 해서 귀찮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저 가만히 얌전히 있어 주기를 바라며 내가 좋아하던 건 반대하기도 했을 것이다.


비록 귀찮은 아이였지만 얌전한 딸로 내가 자라기를 원하던 식구들의 바람은 아마도 나를 '하고재비'로 만들어 버린 게 분명하다. 붙잡아 주저앉히려는 힘에 비례하는 추진력이 어려서부터 차곡차곡 쌓여서.


자라며 사랑을 안 받은 건 아닌데 엉뚱하게만 받았다. 그래도 하고재비가 된 동력이 하루이틀 쌓인 게 아니니 다 그집에서 자란 덕이라 넘긴다. 덕분에 이젠 그 누가 나를 말리거나 붙잡아해 내는 힘을 지녔다. 뭐든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림도 그린다.




우리 집이 가까워질 때 56×76 종이에수채 2021 리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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