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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교 Oct 22. 2021

적당한 마음의 거리

적당한 마음의 거리

희교
      

오랜만에 엄마의 전화를 산뜻하게 받았다. 엄마에게 온 치매가 더러 고맙기도 했는데 하도 딸을 찾으시는 엄마의 전화에 지쳐서 통화를 조절하며 지내야 했다. 오랜만에 통화를 하며 보니 엄마도 아버지를 보내고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아버지와 같이 지내며 받았던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나 보다 짐작이 되었다.



 

엄마를 두고 온 전의 종이에 펜과 수채 2020 리디아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엄마와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지낸 때로 학교 다녀오면 어디도 못 나가고 집에서 엄마와 저녁 먹고 수다를 떨곤 했다. 공부하러 내 방 들어갔다 엄마가 이불 호청 밟거나 두드리거나 시치거나 고추를 닦거나 가래떡을 썰거나 하면 마루로 나와 엄마를 도와 드렸다. 겨울이면 김장 준비로 무를 썰어야 할 때나 신정을 앞두고 밤을 새워 가래떡을 썰던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목장갑을 끼고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도마와 친구하던 밤 말이다.      


다 자라서야 알았지만 엄마는 그때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의지가 되고 참 좋으셨던가 보다. 위로 아들 둘은 대학생이 되더니 집에 들어오는 꼴을 못 보겠고 막내아들은 고등학생이 되고는 야간자율학습 한다고 늦더니 곧 대학생이 되고는 과제 한다고 늦어야 오니 말이다. 아버지가 부산 근무 10년을 하시던 사이 저녁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식구는 없었다.      

냉동실에 얼려 놓았던 떡을 녹여 저녁을 때우거나 매콤한 쇠고기 국이나 김치찌개 또 매운 북어찜을 갖다놓고 혀를 헤헤 불어가며 엄마와 수다를 떨던 저녁이 엄마와 내가 보낸 저녁이고 이제 자주 그리운 저녁이다.
 

엄마는 집안이 그리 크지 않아도 학문으로 이름난 집안의 딸이다. 외할아버지가 아닌 큰 외할아버지가 정혼한 자리에 시집을 갔는데 그게 내 친가다. 내 친가는 살림을 일군 뒤 혼인에 욕심을 많이 내서 경상도 유수한 집안과 혼인을 텄다. 그 중 하나가 나의 외가다. 견문이 좋은 집안이라 아마 엄마의 배움은 공식적으로는 매우 짧아도 -이는 두고두고 엄마의 한이다- 집안의 대대로 내려오는 지혜가 엄마의 할머니나 어머니 아니면 고모를 통해 엄마에게 전해졌으리라.
 

어릴 때 소풍 가는 날이나 평소 도시락을 쌀 때 시간이 급해 미처 밥을 다 식히지 못하고 뚜껑을 덮어야 하면 밥이 쉬이 상하지 않도록 매실주 통에서 매실을 한 알 꺼내 물기 털어 도시락 한 귀퉁이에 넣어 주셨다.      

봄엔 비가 한 번 오면 날이 따셔지고, 가을엔 비가 한 번 올 때마다 추워지며, 쌀독엔 마른 고추 넣어 두어 벌레 안 나게 하는 요령 등을 엄마는 그냥 알고 있었다. 감기로 열이 오를 때면 밀가루나 닭 음식은 먹지 말라 하셨다. 열나는 감기에는 차게 해 주는 기운의 음식을 먹어야 열을 식혀 주는데 그 음식들은 다 속을 따숩게 해 준다고 말이다.      


돌이켜 보면 엄마는 도전 정신도 강했다. 마요네즈나 약과 등을 집에서 만들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어디서 듣고 오셔서 해 보았던 거다. 먹성 좋은 장정 셋을 키우는 엄마의 우선 과제는 식비 절약이었을 테니까. 돈가스도 잡채도 쇠고기국도 카레도 들통에다 그득그득 만들고 끓여야 했던 집에서 케첩이나 마요네즈 그리고 한겨울의 간식에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면 태평양 물이라도 퍼오려 했을 우리 엄마다.      


50대의 몇 해 동안 엄마가 뜨개질을 했다. 여름부터 시작해 겨울에 입힐 스웨터들을 떴다. 그러면 겨울에 엄마가 떠준 털실 외투를 입을 수 있었다. 한 해는 아빠 거, 그 다음 해는 큰오빠 꺼, 그렇게 하나씩 생겼다. 그러다가 드디어 오리털 파카가 나왔다. 겨울철 내내 입은 파카를 빨아야 할 때 드라이클리닝 맡길 거라니까 “그기 털에서 기름기가 다 빠지면 안 따실 낀데 우얄라꼬 드라이를 하노”하며 드라이클리닝에 근본적으로 반대하셨다. 당시에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기름기가 빠지다니 무슨 말인가 말이다.      


엄마가 신문이나 여성지를 꼼꼼하게 읽는 모습을 본 적은 없으므로 그 시절에 어느 지면으로 익혔을 리는 없고 아마 이 정도의 상식은 외할머니의 잔소리와 엄마의 관찰로 얻어졌을 것이다. 물론 엄마는 밥상을 차리며 반찬을 덜어낸다거나 침이 안 섞이게 유난을 떨진 않으셨지만 끓여 놓아야 하는 찌개나 탕류는 잊지 않고 새로 끓여 놓았다. 항아리에서 된장을 뜰 때는 물론 반찬 만들어 통에 옮겨 담을 때에도 물기 없이 마른 숟가락을 써야 했다. 엄마가 내게 지켜야 한다고 일러 주는 규칙은 너무나 많았고 어린 내게는 굉장히 까다로웠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한 그 모든 것을 엄마는 몸에 밴 듯이 알고 계셨다.       


바느질을 하면 방에 들어가 있는 나를 불러 꿰 달라고 실과 바늘을 넘겨주셨는데 매듭을 지어서 드리면 그리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해서 주면 받는 사람이 단명한다고. 손톱 발톱도 밤에 깎는 게 아니라고, 부모가 단명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아들 귀한 외가에서 자란 엄마는 오빠가 하나 있다면 소원이 더 없겠다고 생각했다며 내게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과연 내 오빠들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지나치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집에서 엄마에게 나보다 덜 귀한 것이 없었고 세상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엄마는 내게 가르쳤다. 외할머니가 대여섯 명이나 되는 딸을 대하던 태도는 고스란히 엄마에게 내려왔을 테니 그것 또한 외가에서 엄마가 체득한 ‘인생의 대명제’였으리라고 이제는 짐작한다. 나를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엄마의 몫이 있다면 엄마가 평생의 한이거나 대오각성하여서야 깨달은 서너 가지 교육적인 부분에 한한다. 누구도 찬성하지 않는 내 유학 결정을 내려 주고 밀어붙이도록 한 것 같은 일 말이다.      


아버지의 벌이가 충분치 않았다면, 또 우리가 서울에 살지 않았다면 엄마는 나를 서울로 대학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서인가, 내가 대학 들어가자마자 과외하며 벌어서 살림에 보탰던 일은 오빠들이 가끔 부분 장학금을 탄 일에 대면 새발의 피도 되지 않았다.      


평생 아버지가 생활비로 주시는 돈이 우리 남매 넷의 용돈과 식비 등으로 풍족할 리 없건만 엄마는 평생 아끼고 아껴 돈을 모았다. 한쪽이 돈을 안 모으니 다른 한쪽은 모아야만 한다며. 그렇게 모은 돈은 평생 엄마의 비자금이 되어 마음 한구석이나마 넉넉하게 해 주었을 테다.      


엄마가 늘 열심히 살아서 자식들과 남편도 그리 살기를 바라시니 부담스럽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방치했던 작은아이 공부를 뒤늦게 봐주기 시작하면서 알았다. 엄마도 늘 그랬을 거란 걸. 잘해 주고 싶고 잘 키우고 싶어 그랬을 거란 걸. 최선을 다하는 건 각자 다 다르니까. 엄마의 최선은 내일 어떨지 모를 만약에 대비하여 아끼고 저금하는 일이었던 거다. 엄마가 내 마음까지 살필 겨를이 없었던 것처럼 내 마음이 엄마 마음에 오롯이 가닿은 적도 몇 번 없을 거다.      


전의에 두고 온 내 마음 종이에 펜과 수채 2020 리디아


그래서 미처 느끼진 못했을지 몰라도 적당한 마음의 거리가 이미 엄마와 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딸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아껴 주지 않던 엄마가 나를 소비하던 어린 시절에 엄마를 위해 살며 엄마를 가까이 하지 않고자 했다면 이제는 엄마를 위해 살지 않을 용기, 엄마를 적당히만 가까이 할 용기를 가지려 한다. 엄마에게 그리 미안해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씀씀이가 헤프던 아버지가 우리 남매 넷을 키운 건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다고 생각했던 엄마가, 아버지가 우리 넷을 키우려면 대단히 ‘알뜰히’ 살았을 거라고 말하신 오늘을 기억해 두겠다. 뒤늦게 찾아온 엄마의 여유에 감사하며. 엄마의 여유 있는 마음이 내 마음에 또 얼마간의 휴식을 주리라는 데 고마워하며. 엄마와 나의 물리적 거리인 충남 전의와 파주의 거리를 잊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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