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교 Oct 24. 2021

고백

가만히 들여다보니

고백

희교
 

아담한 내 엄마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36년 한여름, 섬처럼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섬마라고 불리는 작은 동네에서. 생시는 외할머니가 또 낳은 딸이라고 신경도 안 써 모른다. 그래도 딸 넷 중에 인물이 가장 좋아 외할아버지가 이뻐하셨다. 

“엄마 그 말투는 누굴 닮았어?”

“니 외할아부지.”

“웃대 재산 형님에게 다 뺏기고 살아 그런가 자주 한탄하고 많이 울적해 하셨다.”

     

외할아버지를 닮은 엄마의 신세 한탄은 그렇다 쳐도 엄마의 아들 집착도 또 그렇다 쳐도 내게 보이는 단속과 집착과 소유욕은 참 받아들이기 어렵다. 결혼을 하고 몇 달 안 지나 전화 연락이 안 되는 곳으로 후배와 며칠 여행을 갔을 때 남편의 메일을 받았다. 장인과 장모가 걱정하시니 전화 한 번만 드리라고. 그때만 해도 난 이게 독립이나 분리의 문제인지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나도 엄마 못지않게 어리석고 단순하고 늦되어서 세상 읽기에는 젬병이었으므로. 그저 피곤하기만 했다.      


큰오빠는 다행히 결혼 전에 상담을 받았다. 길어지는 보따리장수 생활에 선을 끝도 없이 보러 나가도 전부 퇴짜를 놓으면서. 그건 맞선 상대가 맘에 안 들어서만은 아닐 것이었다. 결혼 안 하려고 트집을 잡는 거지. 어려서부터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오빠의 마음에 결혼이라는 건 한 여성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일이라고 각인되어 있었다.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부모와 가족에 대한 상이 좋지 않으니 결혼을 위한 맞선이 좋은 결과일 리가 없을 터. 오빠는 내게도 상담을 권했었는데 나는 내 속을 까보일 자신이 없어 상담자를 한 번 만나고는 더 진행하지 않았다. 

     

요새 요양원 계시는 엄마와 전화 통화를 조절해야 하는 시간을 보내며 나는 점점 큰오빠에게 묻고 싶어졌다. 그래서 엄마를 어떻게 정리했느냐고. 엄마가 우리 남매들의 보호를 받은 우리 집에서, 오빠에게 과하게 의존하는 엄마를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종종 짜증내면서도 엄마의 요구에 한결같이 응답할 수 있었느냐고. 늘 딸의 안부가 궁금한 게 아니고 자신의 안부를 전하기 바쁜 엄마에게 내가 멀어지고 가까워지고를 반복했다면 큰오빠는 나름 일관성이 있었다.      


작년 코로나 와중에 엄마를 뵈러 요양원에 갔을 때 엄마의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하소연과 넋두리 그 중간쯤인 말끝에 큰오빠는 “엄마는 사랑을 늘 받으려고만 하셨잖아요.”라고 응수했다. 오빠도 알고 있었구나 싶어 속으로 적잖이 놀랐지만 티내지 않고 헤어졌는데 오빠는 그걸 알고도 엄마의 얼토당토 안 한 요구에도 거의 큰소리 안 하고 해 드리는 거냐고 묻고 싶은 충동이 자꾸 일었다. 나는 내게 자꾸만 달라고 하면 안 주고 싶어지니까 말이다.      


내가 나를 과하게 좋아해 주는 사람은 기회를 봐서 쳐내는 식으로 산다면 큰오빠는 자신을 좋아하는 친구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곁에 둔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라서 늘 그런 사랑을 했다. 큰오빠는 많이 늦은 나이에 엄마와 오빠 사이를 인정해 주어야 함을 다 아는 큰새언니와 결혼했다. 이는 엄마의 복일까, 큰오빠의 복일까, 아니 나의 복인가.    

 

저녁밥을 같이 먹고 해 지는 밖을 바라보던 엄마의 옆모습을 기억한다. 쓸쓸하던 엄마의 등. 이제 안다, 내 옆모습과 내 등이 엄마의 그 옆모습과 등을 많이 닮았고 점점 더 닮아가리라는 것을. 그리고 엄마를 사랑한다는 것을. 나의 어린 순간에 엄마가 없었던 순간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그 순간이 있어서 지금 여기 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엄마를 미워하며 사랑한 나는 지금부터 훨씬 더 엄마가 그리울 것이므로. 


엄마를 보듯이 종이에 펜 2019 리디아


이전 02화 아버지의 축음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