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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교 Sep 26. 2021

아버지의 축음기

퇴로 가는 길

아버지의 축음기

희교    

      

“갔어. 왜 안 가. 갔지. 새벽같이 떠났어. 근데 곰배령에 그때 눈이 아주 많이 왔어. 가보니 벌써 졸업식은 다 끝난 거야.”      

왜 졸업식에 온다고 해 놓고선 안 왔냐고 족히 20년도 더 지나서야 따지며 묻는 딸에게 아버지가 하는 말이다. 그때 들고 갔던 꽃다발을 말려 여태 갖고 있던 아버지는 딸에게 그 꽃다발을 갖다 주려고 오래오래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온다.   

  

요새 보는 드라마 <천상의 화원 곰배령>의 한 대목이다. 최불암 씨가 딸을 기다리게 한 아버지로, 왜 다들 자기보고는 기다리라고만 하냐고 악다구니 하는 딸로는 유호정 씨가 열연한다. ‘안 가긴 왜 안 가.’라는 외침이 메아리치며 울려 퍼진다. ‘왜 안 해 주고 싶겠어 왜.’로 ‘왜 안 입히고 싶었겠어 왜.’로 바뀌어서.     

나도 아버지하고 저렇게 나누었어야 하는 말들이 있었을 것이다. 왜 그때 그리하셨냐고, 왜 이리 안 하셨냐고 물었더라면 나도 그 말을 들었을 것만 같다. “그리 했지, 안 하기는 와(왜) 안 해.”라고 말이다.     

    

“아부지, 잘 지내세요.”

“그래. 그래.”

“네, 저도 잘 지내요.”

“그래. 그래.”     

아버지한테 가서 뭘 여쭈면 아버지가 지금도 “그래 그렇나.” 하시는 듯해요. 아버지가 장흥의 요양원에 계실 때 제가 가서 “아부지, 오늘은 날씨가 좋아요.”라거나 “6월 촌데 벌써 산에 나무들이 초록이에요.” 아니면 “오늘은 비가 와요.” 라든가 "오늘은 안개가 많이 꼈어요." 등의 날씨 리포트를 하면 늘 “허허허, 그렇나.” 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요.     



영문클래식문고 종이에색연필 2020 Lydia


아버지가 물려주신 영문판 클래식 문고를 작년 봄 집 정리하다가 꺼내보았어요. 먼지 턴다고 후루룩 넘기는데 웬 종이가 반으로 접힌 채 툭 떨어지대요. ‘부산시 연산구 ○번지 이○○ 씨 댁 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잠깐 사이에 누구일까, 아버지 제자일까, 아버지 첫사랑일까, 동료 교사일까 여러 생각이 스쳐갔어요. 그리고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한 번 찾아나서 볼까 상상도 했고요.      


거의 70년의 세월을 건너 저에게 와 인사하는 아버지의 젊은 날이 참으로 반가웠어요. 아버지의 빛나는 젊은 날이 성큼 다가와 말을 걸어 주어 저도 사랑의 인사를 보냈어요. 아버지가 저의 아버지이기만 했던 건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 싶었던 순간이에요. 아버지에게도 아버지에게 소중했던 사람을 가슴에 품은 때가 있고 재미난 걸 찾아다니던 시간이 있어서요.      


아버지를 자주 생각해요. 아버지의 여름 실내복도 여름이 되니 또 떠올라요. 날강날강해져서 색도 다 바래 버린 하늘색 바지와 다 늘어진 러닝, 그리고 아버지 앉으시는 의자 등받이에 늘 걸려 있던 땀 닦던 수건도요.      

세빈이가 아직 중학생이던 어느 여름 날, 요구르트 다섯 개 들이 묶음을 통째로 들고 빨대 하나를 차례로 꽂아가면서 먹었어요. 왜 그리 먹냐고 물으니 맛도 있고 시원하다고 해요. 손주들이 모이면 주겠다고 열 개들이 요구르트를 사다놓고는 아이들이 놀다가 무언가 먹을 걸 찾는 눈치로 두리번거리면 얼른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가위로 비닐을 탁탁 끊어 빨대를 꽂아 주시던 아버지 생각이 났지요. 졸졸 아버지 앞에 둘러서 있던 손주들에게 하나씩 주실 때 아버지의 흐뭇한 표정을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재작년은 참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느라고 몸이 아팠겠지요. 힘든 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그리움은 또 전혀 다른 문제네요. 오래도록 죽을 때까지 가겠죠. 아버지 발인하던 날, 그 아침까지 저는 뒤척이기만 했을 뿐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어요. 그리 슬픈 것도 아닌데 그냥 좀 기분이 이상하고 눈이 초롱초롱하기만 했어요.
 

장례를 마무리하고 와서도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저 몹시 외로웠어요. 모서방이 있고 애들도 다 있고 오빠들과도 끊임없이 톡을 나누는데도 그 외로움은 어찌 해결이 안 되었어요. 아버지가 ‘진아야!’ 하고 부르시는 목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듣고 싶어서 녹음해 놓은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다 찾아보았지만 들을 수 없었어요.      


어느 날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베란다로 나와 꽃밭을 둘러보았어요. 밤에 그려서 사진을 찍으려니 자꾸 어둡게 나오길래 그날은 아침에 하나 그려서 자연광에 사진을 찍자고 마음을 먹었거든요. 그래서 향이 아주 좋던 스파티필럼이라는 꽃을 그렸어요.


스파티필럼 종이에 펜 2020 Lydia

      

그리는 내내 아버지가 그 그림 안 어디에서 저를 보고 계신 것만 같은 거예요. 지금도 아버지가 살펴주셔서 제 꽃밭에 꽃들이랑 풀들이 잘 자랄 거 같았고, 거기다가 아버지 엄마가 베란다에 늘 키우시던 군자란이며 서양란 행운목이 잘 자라던 이유를 조금이긴 해도 알 것만 같은 거예요. 제가 가면 “군자란 꽃 피었다, 진아야. 나가 봐라.” 하시던 아버지 엄마의 사랑과 관심이었던 거지요. 그리고 제가 바로 그 사랑을 먹고 자랐을 거예요.     


얼마 전부터 축음기가 자꾸 떠올라, 하루는 검색을 해보았어요. 내내 마루에 앉아 있던 밤색 축음기. 아버지가 부산 계실 때 수집하신 골동품이잖아요. 엄마에게 죽도록 미움 받은 슬픈 전설을 가진. 희미하긴 해도 아버지가 기분 좋으시던 어느 날, 축음기를 틀어 흘러나오는 노래의 선율을 따라 흥얼거리시던 기억도 나요. 마루 닦을 때마다 그 위에 아무렇게나 얹혀 있던 것들을 치우고 닦아 주곤 했었어요. 그 축음기를 하나 떠올리고 그리던 날 행복해졌어요, 마치 아버지를 다시 가진 것처럼요. 아버지 우리가 함께한 날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치요.     


아버지가 늘 앉아 계시던 마루의 아버지 구역에는 어떤 냄새가 있었어요. 장마가 닥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그 냄새가 실려오대요. 자다 깨서 갑자기 이게 무슨 냄새인가 생각했어요. 뭔가 서늘하고 외로움이 묻어 있고, 아버지의 웃음이나 얼굴에 묻어 있었을 법한 그런 냄새가요. 그건 아버지의 냄새였어요. 이게 뭐지 하고 한참 헤맸더니만. 재떨이 냄새였던 거예요. 어떻게 그 재떨이를 잊을 수 있을까요. 제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순간부터 줄곧 아버지 옆에 있던 것을요. 투명한 네모 재떨이와 라이터, 손톱깎이 키트가 놓인 직사각형의 깰쪼롬한 쟁반 같은 것을.     


아버지 누워 지내시던 요양원의 사물함에 큰오빠가 붙여 둔 아버지 증명 사진을 보고 알았어요. 제 눈 밑에 둥글둥글하게 지는 주름이 누구한테서 온 건지를요. 엄마의 얼굴보다는 약간 남성스러운 제 얼굴에서 주름은 더더군다나 엄마한테서 받은 건 아니더라고요. 우리 여섯 식구가 모두 같이 어디를 갈 때면 늘 앞장서시는 아버지한테 달려가곤 했지요. 그러면 아버지가 제 손을 잡아 주머니에 넣어 주시곤 했어요. 다정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손으로 전해졌겠지요.     


저는 배리 매닐로우의 <Ships>라는 노래를 좋아해요, 아버지. 이 가수의 노래를 몇 곡이나 알고 좋아한 게 벌써 수십 해지만 아버지에 대해 노래하는 이 노래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아버지가 계시면 틀어 드릴 텐데, 들으시면 아버지도 분명히 좋아하실 텐데요. ‘우리는 네가 쓸 때야만 너를 읽을 수 있단다.’라고 아들에게 말하는 아버지 이야기인 이 노래를 들으면서 아버지와 저의 관계를 헤아려 보았어요. 아버지에게 저는 자주 쓰는 딸이었던가요. 아버지는 저를 잘 읽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 해도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제 눈에, 얼굴에, 이름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아요, 아버지.      



곰배령의 아버지는 딸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가려 했으나 못 갔다. 딸이 그 일에 대해 ‘쓰'자 바로 ‘읽’고 말려 놓았던 꽃을 주었다. 딸은 무릎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었을 아버지에 대해서는 눈곱만치도 몰랐을 거다. 나는 아직도 모르고, 하는 수 없이 영영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나를 위해 했을 수도 있는 ‘쓰기’를 이제는 곡해 없이 '읽'고 저장해 둘 것이다. 내게 쓰셨을 사랑의 말들은 물론 잔소리와 타박과 꾸지람까지 온통 다, 내 눈을 가리던 다른 시선에서 벗어나서.      


아버지의 축음기 종이에 펜 2020 Ly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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