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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교 Sep 17. 2021

오래된 나무, 아버지의 집

가만히 들여다본 것 1

쓰고 그리는 이화진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리는 이유를 알아보려고 쓰고 그리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리는 일은 정말 좋고 그리는 시간이 정말 행복합니다. 그래서 자꾸 그립니다. 가만히 들여다본 것들, 문득 떠오른 것들, 아이와 투닥거리는 일상 등이 담기는 글을 쓰고 그날 그날 마음이 동하는 장면을 그립니다. 그림과 글이 맞아떨어지도록 잘 골라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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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나무, 아버지의 집

희교          

 

<퇴로 할아버지 댁의 안채> 25,5x35.7 종이에 색연필 2019 Lydia


어릴 때 살았던 집들이 이사 나오고 일찌감치 허물어졌다. 상가 건물이 되거나 재개발되거나. 그래서인지 오래된 집들을 보면 반갑다. 아버지가 먼 길 떠나고 찾아간 옆 동네 중국음식점 주차장에서 본 나무가 온몸에 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나를 향해 빛을 쏘았다. 마치 아버지가 찾아왔나 싶게, 찬란하게.     


나의 본적지이면서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밀양 퇴로는 고즈넉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고가 마을이 되어 있다. 마을 입구의 들마당에는 접시꽃과 인형들도 서 있다. 재작년 6월에 가서 마을을 둥그렇게 한 바퀴 돌 때 어린 아버지가 이 골목길을 걸었을 모습과 조카나 사촌 육촌 팔촌 형제들과 놀며 뛰어다녔을 모습이 상상되어 울컥했다. 골목 하나를 돌면 바로 아버지가 나타날 것만 같아서.
 

처음엔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살살 걸으며 마을이 눈에 좀 들어오고서야 막 도착했을 때 만났던 골목이 바로 할아버지가 두 형제분과 집을 지어서 모여 살았던 골목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다시 가서 골목 입구에 서니 기억보다 넓었다. 증조할아버지께서 살았던 집을 큰할아버지에게 넘겨주게 되자 세 분 할아버지에게 우애 좋게 모여 살라고 마련해 준 마음이었던 거다.       


그 집에서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한두 살 차이 나는 손주도 봤다. 큰집 사촌오빠가 네 살쯤 그러니까 아버지가 다섯 살쯤 증조할아버지 댁과 이웃한 지금의 큰집을 사서 이사 갔다. 지금은 비록 집터만 남아 있지만, 옛 할아버지 댁은 아버지의 집이 되었고 나와 세 오빠들의 본적지가 되었다. 엄마에게 확인해 본 바, 그 집에 살림을 났던 건 아니지만 본채는 옮겨지고 방 한 칸 남은 집에서 늦은 밤까지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린 엄마가 잠시 살았다.      


우리 4남매를 데리고 퇴로에 가기 좋아했던 아버지는 도착하여 한숨 돌리거나 떠나기 전이면 꼭 아버지 밭을 보러 가자 했다. 지금도 그 밭의 감나무는 튼튼한 잎으로 반짝거린다. 마치 아버지의 마음처럼,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의 손주인 우리 넷을 데리고 앞장서 그 마을을 걸을 때, 도랑을 건너고 할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저수지를 지나고 산정까지 걸어가는 동안 아버지는 얼마나 뿌듯했던 걸까.     


할아버지 댁이었던, 지금은 큰집인 집 앞에 서보니 어릴 때 이 집에 들러 할머니께 인사 드리고 밥도 먹었던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할아버지 댁 마당엔 큰 감나무가 있어 가을이면 감도 열리고 여름이면 수국도 피는 꽤 너른 화단이 있다. 이 화단이 보이는, 할아버지께서 기거하던 사랑채의 축대가 제법 높았다. 할아버지는 사랑채의 마루에서 이 화단을 자주 보셨을까. 나의 큰오빠는 할아버지 뵈러 올 때면 이 축대 아래서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아직도 수염 기른 할아버지와 함께 큰오빠가 그 집 마루에 앉아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할아버지의 퇴로> 28x35.6 종이에 수채 2021 Lydia

퇴로는 감이 많이 나서 어릴 때는 해마다 가을이면 홍시를 받았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 계실 때면 할머니 앞에 홍시를 두고 앉아 손은 물론이고 코와 뺨에 빨갛게 묻히며 입으로 슥슥 맛난 홍시를 파먹곤 했다. 안채를 퇴로에서는 정침이라고 부르는데, 할아버지는 한겨울이 아니면 식구들과 함께 정침 너른 마루에서 진지를 드셨다. 안채 중 행랑채 옆으로는 증조할아버지 댁이랑 통하도록 할아버지가 낸 쪽문이 있다. 일찍 돌아가신 큰할아버지를 대신해 아침저녁으로 증조할아버지께 문안을 드리러 드나들던 문이다.      


아버지가 술 한 잔 걸치면 자랑스레 읊으시던 우리 집안 정자 중에는 도원정과 금시당이 있고 아랫산정도 있다. 아버지 가신 후 이 정자들을 그렸다. 혼자서는 멀리 걸음하지 못했던 5년여의 시간 동안 아버지가 가장 가고 싶었을 곳일 듯하여. 아버지 보라고, 또 아버지인 양 수십 번 수백 번 바라보며.      


아버지를 보내고서야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자세히 보고 싶어졌고 볼 수 있게 되었다. 엄하시던 할아버지와 잔정 많지만 순종적이었던 할머니 사이에 망국의 혼란과 전쟁의 시기에 막둥이로 태어나 자란 아버지의 맘고생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전쟁 전후로 기울어 버린 할아버지의 살림은 아버지를 가까운 대구에서 공부하게 하고 퇴로로 돌아와 교편을 잡게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받는 월급에서 이자가 나가기도 했고 엄마와 아버지가 혼례를 올릴 때 할머니로부터 약조 받았던 집도 한 채 살림날 때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모든 회한을 가슴에 품고 87년 평생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퇴로에 갈 때마다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하면 서운하기도 했을 텐데 효성과 우애심 지극하신지라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아들로 도움 하나 안 받고 한 일가를 이룬 아버지는 우리 넷에게 할아버지를 증조할아버지를 느끼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싶으셨으리라. 어릴 땐 도무지 알아챌 수 없었던 마음들이 나이 쉰이 넘으니 조금 알게 된다.     


부디 아버지 맑은 눈으로 아름답고 정든 퇴로와 다시 만나셨기를. 나는 자주 퇴로에 다니며 스케치해 두고 퇴로에서의 아버지와 엄마를 기릴 테니. 마을 입구에 선 몇백년 된 나무가 마을을 보듬고 지켜 준 것처럼 나를 지켜 주실 아버지, 보고 싶다고, 애쓰셨고 수고하셨다고 말씀드릴 테니.     


꽃 이름에도 옛 집에도 오래 정이 없었다. 늘 보이고 오래된 것들에 다 심드렁했을 뿐이다. 그러던 내가 마당에 나무가 있는 집이나 집 뒤로 펌프나 장독대가 있을 법한 집들이 좋아졌다. 슬픔과 기쁨을 그 안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했을 나무나 오래된 집들을 그리자면 그 집들이 가진 이야기들이 다가오는 것만 같아서. 나무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지고 세워진 쌀 포대와 경운기 그리고 자전거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가 내 그림에 담길 것 같아서. 그래서 그린다, 나는 오래된 집들을 그리며 위로받는다.      


<안동 도산서원의 아버지> 2020 종이에수채 Ly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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