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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교 Oct 22. 2021

십년 차이

10년 차이

희교

          

문득문득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짧은 소설 제목이 떠오르곤 했다. 작가나 내용은 크게 기억이 없지만 글이 실렸던 잡지 <현대문학>은 또록또록하게 남아 있다. 좍 깔리는 목소리로 우리를 자주 재우셨던 고1 때 국어 선생님이 이 잡지를 들고 읽던 나를 보고는 아마 무언가 관심을 보여서일 테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큰오빠가 사 모으는 책 중 하나라고 답했던 기억이 나니까.     


그랬다. 어린 시절 내가 열 살이면 큰오빠는 스무 살, 내가 서른 살이면 마흔 살, 나랑 비슷한 연배지 하고 무심결에 느끼는 건 분명 큰 착각이다. 오빠 덕에 아주 어려서부터 턴테이블과 엘피라는 물건을 구경하고, 잔소리를 들으면서 만지기 시작했고 내 손으로 사지 않아도 집에 끝도 없이 쌓이는 책을 보며 저걸 다 읽지 않으면 나는 책을 못 사는 거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책을 굉장히 어려워했다. 친하게 지내지 않아서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기 일쑤였고 그러니 책을 한 권 집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등굣길에 무심코 집은 <현대문학>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유홍종 작가의 소설을 읽게 됐던 거다. 이런 식으로 어릴 때 은연중에 섭렵한 노래나 글이 많다보니 연대 폭이 친구들보다 넓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맏이인 친구들은 내가 알고 기억하는 라디오 극이나 노래를 거의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다.     


‘아차부인 재치부인’, ‘가로수를 누비며’, ‘푸른 신호등’, ‘고교 졸업반’, ‘모든 것 끝난 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아침 7시 라디오 뉴스가 끝나면 들었던 짧은 라디오 드라마 ‘아차부인 재치부인’이다. 아차, 하며 이래저래 했는데 어쩌지요, 하는 아차부인에게 음 그거는 이러저러하게 해봐요, 하며 조언해 주는 재치부인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아버지 출근 준비 시간에 잠결이어도 괜찮았던 어린 내가 아랫목에 누워 들었다. 이는 물론 아버지가 라디오를 켜 놓은 덕에 접한 것이지만 그 후 나의 문화적 접견은 큰오빠가 물어다 놓는 문물들의 대향연이다.

 

집엔 큰 상이 있어서 할머니까지 오시면 일곱 사람이 앉아 먹을 수 있었다. 거기에 큰오빠가 주동이 되어 오빠들이 함께 전지로 만든 야구 판을 놓고 시합을 벌였다. 책받침을 동그랗게 잘라 조그만 공을 만들고 타석과 누석에 세울 선수들의 이름을 두꺼운 종이를 작게 잘라 만든 카드에 적고 테두리를 색깔 사인펜으로 입혀 팀을 구분했다. 공을 모나미 볼펜 앞부분으로 톡톡 튕겨서 보내는 게임이다. 그러니까 경기의 시작은 선수 이름 카드를 상 위에 늘어놓고 가위바위보로 누가 어느 선수를 데려가는지를 정하는 거였을 거다. 나는 그저 옆에서 앉아 구경하며 김재박, 장효조 등등의 이름을 그때 처음 들었다.
 

팝송이나 좋아하며 중고등학생 시기를 보내던 내게 큰오빠가 들국화를 좋아하던 시기는 시련이었다. 주말 아침마다 성능 좋은 전축 스피커로 그 시끄러운 ‘행진’과 ‘그것만이 내 세상’, ‘세계로 가는 기차’ 따위를 온 집안이 떠나가라 틀었으니까. (이건 도대체 주말 하루 늦잠 좀 자고 싶은 고등학생에 대한 배려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 더욱이 나보고는 올리비아 뉴튼 존 노래 반복해 듣는다고 짜증을 부리면서 말이다.)
 

곧이어 밀물처럼 나온 동물원과 김광석, 김현식, 해바라기의 노래들을 나는 하염없이 들었다. 성향이나 전공 과목의 영향으로 우리말 발음과 표현에 집착이 강한 큰오빠는 흔히들 틀리게 발음하는 단어를 우리 식구들이 틀리게 발음하는 걸 용납하지 않았고 자연히 노래 가사에도 바르지 않은 표현이 나오면 반드시 바로잡아 가며 설명해 줘야만 직성이 풀렸다. (아, 나의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으나 차마 집안의 중요한 권력인 큰오빠에게 그 누가 대들쏘냐!)      


아무튼 밤늦게 집에 돌아와 나를 붙들고 주정 대신 늘어놓던 큰오빠의 노래 해석에 적지 않은 덕을 보았다. 책이 어렵기만 하던 내가 그나마 우리말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던 건 큰오빠의 공인지도 모른다. 토막토막 들리는 가사 속에 숨은 은유나 앞뒤 맥락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으니까. 
 

오빠가 대학생이 되고 우리나라 국영방송에서 드디어 외화시리즈를 방영하기 시작했다. ‘야망의 계절’이나 ‘아버지를 위한 노래’ 등등을 오빠와 함께 보았다. 오빠의 귀가가 늦는 날이면 비디오플레이어에 녹화버튼을 누르고 혼자서 드라마를 봤다. 나는 막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라 모르는 영어 표현이 즐비했지만 영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내게 영어 제목이나 인물 이름 등은 신기하기만 했다. 
 

잊을 수 없는 노래, 특히 포크송과 팝송의 원천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다. 비지스나 비틀즈, 스모키 그리고 트윈 폴리오 대학 가요제 등의 엘피를 사 모으면서도 큰오빠는 이 프로그램에서 연말에 청취자의 엽서를 받아 선정하는 ‘올해의 가요 100’과 ‘올해의 팝송 100’을 역시나 귀가가 늦는 날이면 녹음하라 했다. 더블데크 카세트가 아니었기에 10시에 녹음 버튼을 누르면 30분이 지나기 전부터 대기하다가 잽싸게 빼서 뒤집어 다시 끼우고 녹음 버튼을 눌러야 나중에 폭풍 잔소리를 면할 수 있었다.


 

이 통에 이장희, 김세환, 윤형주, 송창식, 정태춘, 박은옥 등의 기타 선율이 아름다운 7, 80년대 포크송도 어린 나이에 섭렵할 수 있었다. 나는 아주 어릴 때 들은 김인순이나 현경과 영애의 음정을 좋아해서 거의 외우다시피 흥얼거리며 지내게 된다.
 

중1 겨울에 헤르만 헤세를 처음 만났다. 아마 그로부터 1년 사이에 헤르만 헤세의 지적성장소설 3부작이라 할 수 있는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 그리고 <지와 사랑>을 다 읽어치웠을 거다. 역시나 오빠들이 사놓은 책이어서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왜 이해 못 하면서도 읽긴 다 읽었을까’ 싶으리만치 이 세 권의 줄거리는 헷갈리는데 읽던 그 당시에는 ‘이런 책들을 내가 읽고 있어’ 라는 벅참이 있었던가 보다. 달리 감흥이 크게 남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글이 늦게 트인 탓인지 책을 읽는 속도가 느리고 전체 맥락을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인 채 책을 오래 읽었다. 싫어하진 않았어도 늘 붙들고 있었던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는 것은 어쩌면 내게 책보다 빠르게 흡수 가능한 노래라는 문화 매체가 있어서였는지 모를 일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을 타넘도록 해 준 큰오빠 덕에 어디서 만나는 옛 노래든 환하게 파악하는 나는 이제 와서야 그래서 사는 게 좀 수월했겠구나 싶다. 내 힘으로 개척하지 않아도 오빠들이 물어다 주는 대로 받기만 하면 됐을 테니까. 나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맛볼 수 있었던 단행본과 잡지와 엘피와 카세트 라디오는 그런 작용을 내게 여태 하고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나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일찌감치 누린 신문물 중 뭐니뭐니해도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은 바로 구식 타자기와 AT 컴퓨터와 도트 프린터 그리고 커피 핸드드리퍼다. 다들 보고서를 손으로 써서 내던 대학교 1학년 때 공부에 열성도 아니던 내가 타자기로 쳐서 제출한 보고서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곧이어 맛본 속도 엄청 느리고 작은 용량의 디스켓을 넣었다 뺐다 할 수밖에 없는 삼보 컴퓨터가 들어왔다. 큰오빠가 제대할 때 군 복무 기간 동안 월급을 모아 장만했다. 여러 남매가 컴퓨터 사용 일정을 조율하지 못해 누군가 한밤에 리포트를 쓰기라도 하는 날이면 밤새 시끄러웠다. 타다다닥 타다다다다다 하는 타자기 소리와 찌이이이 찌이이이이잉 하는 프린터 소리가 조용히 멈춘 집안에 늦은 밤까지 울려 퍼졌으니까.
 

그리고 역시 오빠의 제대 후 우리 집 입성 물품으로 기억하는 원두커피 핸드드리퍼. 수동 그라인더도 같이 와서 다들 모여앉아 웅성거리며 ‘이게 뭐냐’, ‘어떻게 하는 거냐’ 하던 기억이 난다. 최초로 원두커피를 대학교 4학년 때였나 집에서 내려먹었을 거다. 그때까지 인스턴트 커피만 먹다가 원두를 직접 갈아 필터로 거르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제조 과정이 낯설다 못해 거부감이 일었다. 굳이 저렇게나 번거롭게 먹어야 하나 싶은 마음에. 쌉쌀하던 첫 커피 한 모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동갑들보다 다채롭게 향유한 문화의 덕이라면 귀로 듣는 노래와 가사 적어가며 슬픔과 기쁨을 느껴 보던 예민한 감수성이 가득 발휘된 것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림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지냈고 글쓰기라는 건 편지가 전부였던 시절은 내게 노래 말고 다른 무엇이 더 끼어들 필요가 있다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아. 그렇다. 삐삐라는 물건도 빠뜨릴 수 없다. 나는 삐삐를 한 번도 안 쓰고 서른이 다 되어서야 걸면 걸리는 걸리버를 가지게 되지만 큰오빠에게는 일찌감치 모토로라 타키온 삐삐를 사주었다. 직장 다니기 시작한 내가 큰오빠에게 준 선물이었을 거다. 아마도 칙칙한 크리스마스 이브 날, 작은오빠는 결혼한 후라 빼고 삼남매가 같이 마루바닥을 긁고 있다가 갓 이사한 일산에서 은평구까지 원정 나가서 디자인과 색상에서 획기적이었던 타키온을, 그것도 자주색으로 골랐다, 우리는. 



 

모토롤라 삐삐 타키온 10.4x15 2021 리디아

그 10년의 차이로 큰오빠는 이제 환갑이 넘어 있다. 할 수 없이 보수적이고 부모님처럼 걱정이 많고 지금도 삐딱이 기질이 있어 삼*폰은 쓰지 않는다. 내가 누렸던 문화의 물결은 오빠가 결혼하며 단절되다시피 했지만 명절이나 아버지나 엄마께 가는 길에 보면 역시나 새로운 걸 열심히 설명한다. 요즘은 영양제 먹어야 한다고 설파하며 갯수까지 적어 한 통씩 주고 공기청정기나 가습기도 천연 방식으로 열심히 골라서 엄마, 아빠 드렸던 게 내게 오기도 한다.
 

이제 알겠다.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많지는 않았겠지만 큰오빠는 신기해 보이거나 필요하다 싶은 것에 늘 진심이라는 것을. 오빠는 고등학생 시절에 미술반 활동을 했다. 그런 실력으로 내 중1 첫 미술 숙제였던 정물 수채화를 도와주며 오만 잔소리를 해 대서 그림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장본인이지만 말이다. (또한 미술 선생님이 칭찬했지만 오빠가 도와주었다고 말하며 내 자존심이 한껏 상했음이 분명하다!)
 

엄마, 아빠에게도 큰오빠는 혼자 열심이다. 나보다 10년이나 더 함께 살았고 맏이였으니 부담과 기대도 어마어마했을 텐데 짜증은 내면서도 한결 같다. 고맙다는 말이 내 입에서 절로 나온다. 나는 오빠가 건강하게 살아서 백살일 오빠가 아흔살일 내게 전해 주는 무언가를 계속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가끔은 내 기호와 취향을 무시당한다 싶기도 하고 너무 꼼꼼하여 답답하다 싶어지기도 하지만 결국엔 내게 기억하여 적어 두고 싶은 영양분으로 남을 테니까. 이 글을 쓰는 이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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