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소중하다
가죽재킷에 선글라스, 목이 긴 운동화를 신고 몸에 딱 맞는 타이트한 청바지에 작은 클러치 하나 내가 상상한 뉴요커였다. 정작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본건 3월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두툼한 패딩에 커다란 부츠들.
한국이랑 다른 건 그런 두툼한 패딩들 사이에 반팔만 입고 지나가는 사람이 여럿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곳에는 사계절이 함께 있었다. 한국은 계절에 따라 옷을 맞추어 입는다. 그런데 뉴욕은 한 거리 한 계절에 4계절의 의상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계절과 상관없이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입는다.
그게 내가 본 첫 뉴요커들의 모습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오늘은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며 옷장문을 연다. 한참을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나갔는데 오늘 너무 덥거나 추워서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그다음은 사람들이 내게 저 사람은 왜 한겨울에 저렇게 얇게 입고 있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이다. 한국은 적절한 이란 단어가 맞다. 가장 적절하게 입어야 한다. 적절하다는 말은 춥지도 덥지도 않게 , 그날 씨에 딱 맞게, 상황과 환경에 딱 맞게, 면접을 볼 때는 정장을 입고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뉴욕에 갔을 때 처음으로 이렇게 사는 게 참 힘든 거구나 생각했다.
늘 사람들의 나를 어떻게 볼까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삶 말이다.
누구나 비슷해야 한다. 내가 살아온 환경에서는. 가을에는 가을 옷을 입어야 하고, 여름에는 여름옷을 입어야 한다. 그래야 이상하지 않다.
사계절이 함께 있는 그곳에 있는 순간 잠시지만 내게는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졌다. 내가 가장 멋있고, 내가 가장 예쁘더라. 추워서 가지고 간 옷을 다 껴입고, 가방은 텅텅 빈 채 서있었지만, 그곳에 있는 내가 참 좋았다.
그게 뉴요커였다.
스트리트의 한 중앙에 서있었는데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말 거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지나가는 말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쇼핑몰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혼자 스트리트를 1시간 동안 걷기도 했다. 그 자유로움이란!!
나는 도착해서 점심이 될 때까지 자유로움을 즐겼다. 오로지 두 발로만... 다리가 아파가 앉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게스트하우스를 구글 지도에 찍었다. 20 스트리트는 걸어야 했지만, 뉴욕의 지하철을 탈 자신은 없었다. 자유를 만끽하며 걷고 또 걸어서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나를 맞아준 사람은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다. 24시간도 안되어서 한국인을 만났지만, 그동안 본의 아니게 닫고 있었던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라 무슨 말이 든 해야 했다. 내가 만난 사람은 게스트하우스의 청소와 안내를 담당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감사하게도 길도 물어보라고 하고, 뉴욕에서 갈 곳을 추천해 주기도 했다. 몸을 녹이고 방을 안내받자마자 한국인과 이야기하고 싶은 나는 이것저것을 물었고, 그 아르바이트생은 콜럼비아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우연이!!
나는 상담심리학으로 대학원을 가려고 고민 중인 인생의 가장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있는 방황하는 한국인이었다.
어려운 결정 앞에서 떠난 여행에서 만나 한국인은 내게 자신이 대기업에서 일하던 사람이고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음으로써 내가 내 인생에서 무언가 확실한 지표와 사인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나보다 더 늦게 대기업을 포기하고 심리학 석박을 하고 있는 그 아르바이트생은 여전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소중하고 가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눈빛으로.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장면처럼 내 인생의 표지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나는 왜 이 곳에 왔을까. 나는 왜 이 사람을 만났을까. 단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 없었다. 내 인생은 순간순간이 소중하다.
뉴욕행을 결정하고 새벽 2시부터 준비하고 낯선 버스에 올라타 오전 내내 걸었던 것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인생에서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있어서 소중하지 그 인생이 대단해서 소중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