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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Jul 27. 2018

아직까지는 봄이다 - 밤을 지새운 물의 맛

부엌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이 몇 가지 있다. 


음식을 할 때는 한쪽에 커피를 한 잔 타 둔다. 재료를 준비하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찬장을 정리하다가, 가스레인지 주변을 닦다가 오며 가며 한 모금씩 마시는 일이 좋다.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면 부엌에서의 노동에 함몰되지 않는다. 커피의 향이 부엌에 있는 내 움직임을 인식하게 한다. 투닥투닥 당근 써는 내 손의 리듬을 깨닫게 하고, 툭툭 달걀물을 체에 받쳐 거를 때 체 바닥으로 달걀물이 뭉쳐 있는 순간을 여운으로 읽게 한다. 

커피가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게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요리사가 아니기에 음식의 맛보다 부엌에서의 내 존재를 한껏 사랑할 수 있는 길을 택한다. 음식 맛이야 당신이 보면 되니까. 


또 내가 좋아하는 일 하나는 면 행주를 깨끗이 삶아 두었다가 설거지한 뒤 물기 조금 뺀 그릇을 닦아서 넣는 일이다. 그건 왠지 살림을 대단히 잘하거나 성격이 깔끔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 같아서, 새하얀 면 행주로 물기 뺀 그릇을 닦고 있자면 내가 조금 멋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은 착각이라도 좋다. 뭐 어떤가. 내가 누군가에게 '나 깔끔한 사람이에요.'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을 속이는 일도 아닌데 말이다.(이건 정말로 내가 흐르는 물처럼 깨끗한 마른행주로 빡빡 씻어놓은 그릇을 닦는 행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자꾸 하게 되는 변명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선물 받은 식재료나 간식 등을 식탁에 늘어놓는 일이다. '물건에 대한 집착'이라고 '소유욕'이라고 말해도 이건 양보할 마음이 없다. 디자인이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 나는 몸 매무시를 다시 하고, 허드렛일 투성이인 주방에서라도 뭐 예쁜 거 하나 걸쳐야지 마음먹게 된다. 아름다운 물건들은 내가 거울을 보았을 때, 그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에서도 예쁜 것 하나쯤 찾고 싶다는 욕망이 들게 한다. 그러니 결국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일은 어디 한 구석이라도 나를 조금은 아름다워지게 한다. 



또 내가 부엌에서 즐기는 일 하나는 밤에 잠들기 전 물을 끓여 두었다가 자연스레 식은 아주 애매한 온도의 물맛을 보는 일이다. 예전에는 아주 차가운 물이나 아주 뜨거운 물만 마실 수 있었다. 애매한 온도의 물은 취향을 넘어서 입에 대기 껄끄러운, 먹지 못할 무엇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애매한 온도가 참 좋다. 


뜨거운 상태에서 서서히 열을 빼앗기다가 이내 마실 수 있는 적정온도가 되고, 
만일 공기가 차다면 더 차가워지고 
공기가 따뜻하다면 더 서서히 식는 
그 유연함도 참 좋다. 


게다가 자다 깨서 식탁 앞에서 주전자의 물을 천천히 따를 때 얼마나 식었을까 궁금해하는... 참말로 별스러운 호기심도 즐겁고, 정수기 꼭지 아래 컵을 가져다 대고 버튼을 누르면 쪼르르 요란하게 떨어지는 그 소리와 달리 주전자를 기울이면 주전자 입을 통해서 흐르듯 소리 없이 내려오는 그 모양도 만족스럽다. 다 잠든 밤에 고요히 물 마시기 좋다, 주전자는. 


아침에 물을 마실 때는 또 어떠한가. 다 식어 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그 물의 맛은 안도와 알지 못할 다행스러움과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밤을 지새운 주전자 속 물에는 
별빛도 지나다 들렀을 것만 같고, 
바람도 흐르다 잠시 쉬었을 것만 같은 맛이 있다. 


물이 어느 정도 식으면 냉장고에 부지런히 넣어야 하는데, 핑계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주전자의 물이 다 식을 때까지 냉장고에 넣지를 못하겠다. 이런 즐거움 때문에. 이 즐거움도 여름이 오기 전까지만이다. 


여름이 오기 전까지만, 끊인 물을 상온에 두고 마시는 사치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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