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던 것처럼
무거운 몸뚱이를 운전석으로 밀어 넣으며 찌그러지듯이 구겨진 나는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었다. 출근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모두가 떠나버린 주차장은 겨울 들판처럼 휑했다. 며칠 동안 마음을 상하게 하던 스트레스는 오늘도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친구에게 속마음을 여는 것이 이렇게까지 신중해야 할 일인가.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것일까.
힘들 때 힘들다고 마냥 떠들며 속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를 늦게야 알았다. 말을 하는 것이 유리한지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유리한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저울추를 입에 대고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를 늘 신경 써야 하는 것과도 같다. 언젠가 아주 오래된 친구에게 깊은 상처를 입었던 일을 떠올려 본다. 그때 나는 아주 힘든 일을 겪으며 누구에게든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렇듯이 아무에게나 불쑥 마음을 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나 하소연하듯 속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따뜻한 그 친구의 위로와 조언에 큰 힘을 얻었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끼리는 오랜 시간을 함께해도 마음이 열리는 크기가 늘 그대로라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였는지 나도 힘들 때면 곁에 있는 동료보다는 어릴 적 친구를 찾곤 했었으며, 다행스럽게 그 오랜 친구는 그 후로도 가끔 나의 마음을 돌아보며 마음을 써 주곤 했다.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친구들의 모임 자리에서 나는 힘들 때 내가 친구에게 했던 그 이야기가 그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저기 뜯겨 나간 낚시 배 마냥 상처가 났고, 그 배에 덕지덕지 붙은 해초처럼 흉한 살이 붙어있었다. 그때 느꼈던 그 배신감으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물론 그 이야기의 내용은 모두를 앉혀놓고 내가 말했어도 부끄럽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 친구에게만 이야기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어린 시절의 친구라 해도 우린 이미 어른이 되었기에, 우리의 대화 끝에 비밀이니 어쩌니라는 사족을 달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믿었었다. “왜 그랬냐”는 내 물음에 그 친구는 “어쩌다 보니 그랬다”라고 말하며 “알아도 별문제 없지 않냐, 네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라고 답했다. 나는 한동안 할 말을 잃고 혼란스러웠다. 그 친구의 말도 맞다 싶은 생각에 내 판단력이 흐려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분명 나는 그때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아 혼자 고민하다 이야기한다”라고 까지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나의 잘못을 찾고 있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하고 반성문 한 바닥 써와” 선생님의 말씀에 꾸역꾸역 내 잘못을 찾았던 그 어린 시절처럼 말이다. 친구에게 콕 짚어주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그 친구의 말처럼 아무 문제없는데 별스럽게 군 것이 잘못일까? 익숙한 사이일수록 내 마음을 잘 알아줄 거라는 믿음의 크기만큼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동안 나는 어떠했던 걸까? 나도 익숙함에 젖어 상대의 마음을 내 맘대로 헤집어 놓치는 않았었던가 돌아보게 된다.
하루의 피로가 녹아든 아스팔트 위로 바삐 달리는 차들의 붉어진 궁둥이들이 정겹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 녹녹해진 몸을 녹이고 뭉치랑 저녁을 먹어야겠다. 며칠 동안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들은 툭툭 털어버릴 생각이다. 생각해보니 그다지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고, 애당초 내가 여러 친구에게 말했다고 생각하면 간단할 거 같아서이다. 애나 어른이나 모두 겪는 일을 가지고 그랬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나름 현명한 답을 얻었다 싶어 집으로 가는 길이 경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