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녀(木女)

추억여행

by 꽃무릇


걷기를 즐기면서 부터 걸을 때면 꼭 노래를 듣는다. 가끔 의도치 않게 새로운 장르의 노래를 접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추억 속으로 빠져들곤 하는데, 요즘은 특히 유튜브에서 시대를 넘나드는 영상들을 만날 수 있으니 정말이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추억 속의 노래를 들으며 걷다 보면 때론 그 시절의 친구를 떠올리기도 하고,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1979년, 여고 일 학년이었던 나는 피아노를 치시는 음악 선생님의 뒷모습에 마음을 뺏기며 눈물겨운 짝사랑에 빠져들게 되었다. 선생님은 가끔씩 교과서에 실린 곡 외에 서정적인 멜로디를 지닌 다른 곡을 연주해 주시곤 했다. 어느 날, 선생님은 가사가 너무 아름답다고 들어보라고 하며 직접 노래를 불러주셨는데, 그 노래가 얼마나 좋았던지 지금까지도 그 노래는 파릇했던 내 여고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가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목녀(木女)’라는 그 곡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노래가 아니었기에 TV나 라디오에서 좀처럼 들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들어있는 음악수업을 기다리는 것이 나는 너무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 사춘기 여고 시절 누구나 한 번씩 겪는 사랑의 열병, 선생님을 향한 짝사랑은 생각보다 외롭고 슬펐다. 그것은 오로지 나 혼자만의 순정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이 산에서 저 산을 향해 지르는 메아리처럼 그냥 그렇게 혼자 불러대는 외침이었다.


나는 교실 창가 쪽에 앉아 저 멀리 기역자로 꺾인 건물 끝자락 음악실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고, 볼일도 없이 교무실 앞을 서성 거리기도 했다. 어느 날엔 책상 위에 슬그머니 음료수를 하나를 가져다 놓으며 내 마음을 알리고도 싶어 했다. 물론 선생님은 늘 모르는 척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셨다.

높은 담벼락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처럼 답답하기만 나의 짝사랑은 제동력을 잃은 기차처럼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갔다.


언젠가 실기 중간고사를 보던 날엔 하도 긴장을 하는 통에 입술과 혀와 입천장이 쩍 하니 붙는 지경이 돼서 노래 첫마디를 부르지도 못하고 쩔쩔맨 적도 있었다. 내 얼굴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으며 악보를 든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졸업만 하면. 그러면 나도 스무 살이 될 테니 그땐 선생님께 고백을 할 거야. 나는 내게 찾아온 첫사랑을 어떻게든 알려야겠다는 각오로 졸업만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렇게 행운목을 키우는 심정으로 나의 비밀스러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즈음 청천벽력 같은 선생님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선생님은 겨울방학 중에 동료 선생님과 결혼을 하셨고, 곧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신다는 것과 이제부터 학교에 안 나오신다는 것이었다. 심장이 쿵하고 땅속 깊은 곳으로 곤두박질치며 가슴이 찌릿하니 저려왔다. 선생님은 정말 우리에게 인사도 없이 미국으로 가셨고, 그렇게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은 시작도 못해보고 막을 내렸다.



섬 머스마 같던 열일곱 여고생의 마음을 빼앗아버린 선생님의 그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그 노래를 여전히 기억하지만 어디서도 그 노랠 들을 수가 없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며칠 전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그 노래를 찾은 것이다. '신화에서처럼 목녀는 나무에 꽃을 피우게 하고.....' 그 시절 숱하게 불렀던 그 노래를 들으며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나의 여고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눈물 나도록 아름답고 그리운 그 시절이 아련하다.


미국으로 가신 선생님의 소식은 그 후에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피아노를 치고 계실까? 손가락 사이로 은발머리를 빗어넘기시는 인자한 노신사가 되셨을지도 몰라. 지금쯤 칠순이 되셨을 텐데 어디 계시든 건강하시고 평안하셨으면 좋겠다. 추억 속의 그 노래는, 사십이 년 전 단발머리 여고생의 마음에 핫초코 같은 달콤함과 한겨울 칼바람 같은 아픔을 남겨준 짝사랑의 기억과 함께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다. 지나간 시절의 기억들은 황금들녘의 고추잠자리처럼 살랑거리며 나를 스쳐가고,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노래 ‘목녀’를 흥얼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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