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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Jan 30. 2024

<Monologue> 윤위동 전-돌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것의 독백

1월 중순 즈음 매서운 추위가 찾아왔다. 모두들 어딘가에서 웅크리고 있는 건지 코트를 잔뜩 여미고 들어선 압구정동 골목은 한산하기만 했다.

윤위의 <Monologue> 전이 열리고 앗는 'K아르떼' 갤러리 전면에는 색색의 돌들이 그려진 100호 크기의 캔버스가 걸려있었다. 나는 작가에 대한 별 정보 없이 갤러리를 찾았던 터라 작품의 규모와 이미지에 압도되어 건물 입구에 서서 한참 그림을 보았다.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혹은 캔버스에 돌을 붙여두었다 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실물과 똑같은 그림에 이끌려 <Monologue> 전이 열리고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Monologue 708 (캔버스에 아크릴, 193.9*130, 2023)

물론 전에도 놀라운 솜씨로 캔버스에 사물을 옮겨다 놓는 작가들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중학교 미술책에서 김창열(1929~2021)의 물방울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놀라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물방울을 보거나 물방울을 찍은 사진을 보고는 아무렇지 않으면서 물방울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한 그림 앞에서 울컥했던 경험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회귀> 김창열(1929~2021) 2016.

'이 사람은 왜 하필 물방울을 그렸을까. 이렇게 똑같이 그리려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한두 점도 아니도 계속 물방울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런 것이 궁금했고 이 세상에는 그런 일을 계속해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 같다. 그 후로도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극사실주의 회화들 앞에서 잠시나마 늘 경건해졌던 건,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에 대한 모종의 존경과 닿아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삶, 그것도 사물과 그림이 하나로 맞닿을 때까지 붓질을 멈추지 않는 삶은 수행이랄 수밖에 없었다. 사물과 그림이 일치에 이르게 되는 지난한 과정을 상상하면 분주한 일상 안에 잠시 신성(神聖)이 깃드는 것 같았다.

Monologue 782

'K아르떼' 2층에서 만난 윤위동의 'Monologue 782'는 단순히 실물과 똑같은 이미지로 시선을 붙잡아 두는 것은 아니었다. 물이 수증기가 되고 비와 눈이 되는 과정을 배웠던 교실 안에서 암석 순환의 원리도 분명히 배웠을 테지만 돌은 여전히 내게 고정불변의 상징과도 같은 사물이었다. 그런데 윤위동은 단단한 돌이 가루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그림을 통해 돌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돌과 흙 사이에는 붓으로 표현하지 않은 시간이 담겨 있었다. '암석의 윤회'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Monologue> 시리즈를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돌은 살아있다. 죽지 않는다.
순환을 반복하다 완성에 이를 뿐.
우리도 살아있다. 죽지 않는다. 순환하는 중이고 완성이 올 것이다.
(윤위동 작가노트)

Monologue 785

나는 돌 같은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어지간한 더위에는 덥다고 하지 않으며, 어지간한 추위에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는 한창 일하던 사십 대 어느 시기, 불의의 사고로 중환자실의 환자로 오랫동안 누워있었지만 다시 성치 않은 몸을 일으켜 쇠를 만져 기계를 만드는 일터로 나갔으며, 그곳에서 밤낮없이 일을 하며 자식과 부모를 부양했다. 그때의 사고로 걸음이 꽤 불편해졌으나 그는 다리를 핑계 삼아 자신의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불편함을 내세워 장애인 혜택을 누리는 것도 원치 않는다.


팔순을 넘긴 아내가 어느 여름을 넘기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결국 요양원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때,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면회를 가서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하지만 아내는 점점 말수가 없어지고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하루 두 번 안약을 넣는 시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두 개의 핸드폰에 알람을 설정해 두었는데, 아내가 곁에 없는 지금도 알람은 여전히 아침저녁 6시에 울린다. 그는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린다. 그리고 국을 데워 아침을 먹고 작은 상 위에서 신문을 보고 글을 쓴다.


그의 글씨는 대나무처럼 힘차고 곧지만 요즈음 그가 쓰는 글들은 가끔 휘청거린다.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글을 쓰는 이유는 그 의미를 찾기 위해서이지만, 삶은 마지막까지 속내를 잘 보여주지 않는다. 잠시 환하게 알 것 같다가 다시 뿌예진다. 우리는 언제나 하루를 살뿐이지만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숙제와 질문을 던진다. 이십 대에게도, 오십 대에게도, 심지어 팔십에 이르렀음에도.


"생각해 보았자 속만 상하지 엄마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나는 그가 더 이상 답하지 않음으로써 질문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과 대답이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돌의 독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낡은 집에서 낡아가는 아버지.

그 집에서 나의 첫 아이가 할머니의 손에 얹혀 목욕을 했으며, 그는 옆에서 커다란 수건을 펼쳐놓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손녀를 벙실벙실 웃으며 기다렸다.

한때 그는 바위였다가 돌멩이였다가 흙이 되어가는 중인지 모른다.

그가  견뎌낸 시간을 윤위동의 <Monologue>에서 본다.


나는 요즘, 모든 변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늙어가는 몸과 변덕스러운 마음은 물론이요, 숨 가쁘게 발전하는 기술과 그로 인한 원치 않는 편리함까지도 가급적 두루 익숙해지려고 한다.

무중력 훈련을 받는 우주인이 유영하며 농담을 하고 밥을 먹게 될 때까지 무스히 노력하드시 나도 그렇게 해보려고 한다. 아주 오랫동안 이 세상에 없는 존재들이었던 우리를 낳은 것도 변화하는 힘이었듯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는 것 역시 마땅하고도 옳은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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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ologue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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