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할 수 없는, 사람 그리고 시간의 누적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오웬이 숨니에게
숨니, 오늘 회사에서 개최한 세미나 정말 좋지 않았나요?
제 작년보다 작년이 좋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 좋은 성장하는 세미나였던 거 같아요. 저도 나름의 경험치가 쌓여서 그럴까요 올해 세미나의 내용이 유독 더 와닿았는데요, 그중 ‘서사’라는 단에 꽂혔어요.
이번 주 초 팀 이동 관련하여 대표님과 대화를 짧게 나눌 일이 있었어요. 대화의 골자는 '조직 분화'였어요. 대표님이 느끼시기에 모든 구성원이 회사라는 큰 조직으로 묶이는 건 고전적 사고이며, 조직 내 개인화는 자연스러운 변화이기에 본부 단위의 구성, 특히 팀 내 멤버들의 조화와 관계성을 고려하고 그 캐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신다고 하셨죠.
대표님의 말씀은 저에게 꽤나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껏 제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회사들은 개개인의 능력치나 그 사이의 조화, 관계성을 고려하기보다 획일화된 프로세스를 통해 최적화와 고효율을 원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생기고 나니 세미나에서 유독 ‘서사’라는 단어가 제 마음을 간지럽혔던 거 같기도 하고요. 흔히 직장인을 부품에 빗대어 부르던 고전적인 사고에서 서사를 품은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는 조직/팀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겐 꽤 큰 동기부여가 되었거든요. (제 멋대로 한 ‘서사’에 대한 해석)
숨니, 흔히들 어떤 팀을 지칭할 때 이렇게 말하곤 하잖아요? “그 000 캠페인 / 000 브랜드 담당 팀”. 오늘은 캠페인 본부의 N팀이 아닌 숨니팀만이 소유하고 점유할 수 있는 그런 서사를 들어보고 싶어요. 결과와 숫자가 아닌 숨니팀이 축적해 온 특별한 서사를요! 줄글도 좋고, 대표적인 단어도 좋고, 슬로건 등 어떤 형식이라도 상관없어요! 그저 서사만 듣고 숨니팀에 매료될 수 있는 무언가라면 좋겠어요. 막상 서사라는 큰 아젠다가 제 마음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안개 같이 뿌옇게만 보여 숨니팀의 그 무언가를 듣고 영감을 잔뜩 받고 싶어요!
숨니의 답장
리더들은 1년에 상/하반기 두 번의 팀 플랜을 세팅합니다 지난 분기를 돌아보고 다음을 준비하는 내용이죠 저는 22년부터 팀장을 했으니 벌써 6번째 팀플랜을 작성했네요. 보통 저는 팀플랜을 작성하고 마지막으로 플랜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한 줄을 적습니다 세세한 계획은 잊더라도 한 줄만큼은 잊어버리지 않고 늘 상기시키죠.
2022, AE의 정석을 아는 팀
2023, 모두가 리더가 되는 팀
2024, 즐겁게 일하는 감각 키우기
2022년에는 팀장이 처음이라 어떤 계획을 세울지 막막했어요. 그저 제가 노력하면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세웠죠. 여느 팀보다 AE의 기본기가 탄탄한 팀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무심코 하는 일도 왜 이렇게 하면 좋은 지, 왜 이걸 챙겨야 하는지 팀원들에게 설명했죠. 제가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레 팀원들끼리도 이런 공유가 자연스러웠어요. 이 일을 하는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나니 효율적으로 하는 건 일도 아니었죠. 팀원들이 자신감이 붙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기뻤어요.
이렇게 팀을 운영하다 보니 아무래도 저의 인볼브가 많았고, 구성원들도 연차가 쌓여가니 역할 배분의 필요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모두가 리더가 되는 팀’이라는 목표 아래 파트별로 리더를 세워 팀 운영방식을 바꿨죠. 원래는 명확한 가이드를 주면서 일을 했는데 가이드를 하나 둘 벗겨내니 안 보이던 팀원 개개인의 장점이 더 많이 보였어요. 그리고, 팀원들은 의외로 리더가 주는 안전감보다 본인이 주도적으로 일을 할 때 재미를 느낀다는 걸 알았죠. 문제가 생기면 팀장이 나서서 해결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문제를 직접 해결하고 성장해 가는 기쁨이 있다는 것도요. 그래서 다음 해의 플랜은 ‘즐겁게 일하는 감각 키우기’로 세웠습니다. 제가 할 일은 언제 팀원들이 더 즐겁게 일하는지를 발견하고, 그걸 서포트하는 일이었어요. 팀 플랜을 돌아보니 사실은 저의 플랜에 가까웠네요. 팀의 성장이 곧 저의 성장이었죠.
올해 초 <일의 격>, <커넥팅>의 저자 신수정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는데 강의 중반, 올해 12월 31일이 되면 이루고 싶은 게 있는지를 물으셨어요. 그리고, 이루고 싶은걸 문자로 보내게 하셨죠. 저는 올해 연말을 마무리하며 팀원들에게 듣고 싶은 말을 문자로 담아 답장했습니다.
팀원들의 해주었으면 하는 말이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저 스스로에게 듣고 싶은 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와 함께 일하는 팀원들은 지금 재밌게 일하고 있나?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나? 그래서 지금 일도 삶도 건강하다고 느끼는가? 하는 물음에 YES라고 떳떳하게 답할 수 있었으면 했어요. 그러고 보면, 올해뿐만 아니라 팀장이 되던 첫 해부터 지금까지 제가 팀원들 연차에서 이뤘으면 좋았을 것들을 플랜으로 써왔네요. 업무의 기본기를 잘 다졌으면, 숨지 않고 리더십 있게 일했었으면,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고 더 즐겁게 일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요.
그로스 플랜을 쓰면 저는 늘 ‘행복하게 일하기’를 썼습니다. (*회사에서는 매년 초 올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는 각자의 액션플랜을 세팅한다. 분기별로 리더와 면담을 통해 growth path를 점검한다) 그로스 플랜은 팀장님이 조언을 주실 수 있도록 수치적으로 달성 가능한 걸 써야 하는데, 저는 모든 플랜보다 행복이 제일 앞에 있었어요. 그런 저를 이해해 주시는 팀장님들을 만난 덕에 팀장님들은 ‘그래 숨니야 행복한 게 최고지’ 하며 공감해 주셨고, 그로스플랜 면담마다 ‘그래서 요즘 행복한지’를 물어봐주셨어요. 그때마다 제 행복을 점검했고, 엇나가는 것 같으면 다시 바로 잡았죠. 그래서 팀장이 되고 나서도 팀 플랜 중 한 번도 빼놓지 않는 것도 ‘행복감 점검 미팅’입니다. 격월마다 미팅을 하면서 ‘그래서 요즘 행복한지?’ ‘마음에 불편한 건 없는지?’를 물어요. 모두가 첫마디는 ‘없어요! 잘 지내요’ 하다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나 둘 어려움이 나옵니다.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나면 놓치고 있던 행복들이 보이고, 면담이 끝나면 표정이 한결 밝습니다. 제 기분이 다 좋아요.
제 안에는 프로젝트 KPI 달성을 평가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래서 팀원들이 성장했나? 즐거웠나? 이 두 가지죠. 프로젝트는 대박이 났는데, 구성원들의 마음은 죽을 맛이라면 그 프로젝트는 이미 망한 프로젝트라 생각해요. 반대로 중박을 쳐도 함께한 모두가 즐거웠으면 저에게는 성공적인 프로젝트고요. 저는 저희 팀의 서사를 이렇게 적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회사보다는 동아리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멋지고 카리스마 있는 팀장이 되고 싶었지만 아무나 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포기하고 그저 저 다운 팀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저희 팀 팀원들이 느끼기에, 외부에서 느끼기엔 이 모습이 매력적 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저희 팀이 좋습니다. 외부에서 저희 팀을 이야기할 때 가장 듣기 좋은 말은 이거예요
숨니팀은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주말에 산 귀여운 소품을 자랑하고, 맛있는 간식을 다 같이 나눠먹으며 행복을 나누죠. 연달아 미팅을 하다 보면 다들 얼굴이 회색빛이 되는데 4시쯤 야근밥을 시킵니다 한입 먹으면 다들 다시 행복한 얼굴로 돌아갑니다. 행복 가성비가 높은 팀이라고 하죠. 간혹 스트레스받는 일들이 몰려오지만 다 같이 한바탕 짜증을 내고 손을 가운데로 모아 파이팅을 외칩니다 (저는 아직도 이 파이팅 의식이 참 부끄럽습니다) 그렇다고 늘 유들유들하진 않습니다.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굉장히 똑 부러지죠. 누구보다 치열하게 의견을 내고 어느 일 하나 대충 하는 법이 없어요. 매의 눈으로 완성도를 높이죠.
저는 저희 팀이 밖에서 볼 때 대나무보다 강아지풀 같은 팀이면 좋겠어요. 올곧거나 강인한 팀은 아니지만 부러지지 않고 언제든 서로에게 구부러질 준비가 된 팀이요. 저는 저희 팀이 저희 회사 2층에서 가장 시끄러운 팀이라 좋아요. 저희 팀을 거쳐간 친구들이 팀을 옮겨도 숨니팀에서 일할 때 참 열심히 했는데, 즐거웠는데 하고 기억하면 아주 멋진 서사가 아닐까요? 이번 주는 오랜만에 제안 미팅이 있는 주간이네요. 글을 쓰고 나니 왠지 마음을 바로 하게 됩니다. 이번 프로젝트로 멋진 한 줄의 서사가 추가될 수 있게 재밌게 일해봐야겠어요!
숨니가 오웬에게
저도 올해 세미나가 특히나 좋았습니다.
저에게 회사 세미나는 회사의 연례행사이기도 하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 본질, 문화를 리마인드 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연말 시즌이 되면 내년도 마케팅을 준비하는 행사들은 너무 많잖아요. 다양한 업계 사람들이 자리하는 만큼 급진적 변화를 이야기하고 ”뒤처지지 마세요! 지금 빨리 준비해야 합니다!" 하며 조급한 마음을 부추기곤 하죠. 그런데 저희 회사 세미나는 유독 저희 회사다움이 고스란히 묻어나서 좋아요.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변화 이전에 나머지 한 발은 어디에 단단히 둬야 하는지 이야기하죠. 조급함을 부추기기보다 그 마음을 공감해 줘요. 컨퍼런스를 다녀간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 ‘배웠다’ 보다는 ‘위로받았다, 마케터 하길 참 잘했다’라는 코멘트가 많아요. 이 이야기를 누군가 해주길 원했다는 듯이요.
이번 세미나에서 단연 마음에 깊게 새긴 한 단어는 ‘서사’입니다. 오웬은 chat gpt에 요약 기능을 자주 쓰나요? 저는 처음에 그 기능을 발견하고는 몇 백장의 자료, 긴 미팅 내용을 몇 초도 안되어 정리해 주는 걸 보고 일자리의 위협을 느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아 AI는 절대 인간을 대체할 수 없겠구나" 하고요. AI가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서 절대 서사를 담을 순 없을 테니까요.
서사, 내러티브(Narrative)는 ‘자세히 말하다’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narrare’에서 유래된 표현이라고 해요. 요약이 불가한, 시간의 누적과 맥락 안에서 만들어지는 긴 이야기. 제가 저희 회사 세미나를 '우리 회사 다운 행사'라고 이야기했는데, 저한테 이곳은 일 이전에 '사람'을 생각하는 곳이거든요. 브랜드를 고를 때 우리 구성원, 구성원의 가족들에게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는 제품/브랜드 인지를 고민하고, 광고를 만들기 전에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고민해요. 월급으로 보상하는 회사지만 개개인의 성취와 효능감을 케어하고, 내 일이 아니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팀이 있다면 언제든 모두가 도우려고 해요. 이 회사만 다녀봐서, 다른 회사와 비교할 순 없겠지만 제 안에 이 서사가 고스란히 쌓여 저 또한 우리 회사 컬러가 묻어나게 일하고 있더라라고요. 아마 저희 회사 세미나에 매년 오시는 클라이언트들은 저희 회사와 일하면서 그 서사를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세미나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본인이 경험했던 서사와 연결되어 서사의 한 줄을 추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웬과 회사의 서사도 2년 넘게 쌓여가는데, 그간 쌓인 서사를 들려줄래요?
오웬의 답장
참 건강한 회사구나
늦은 밤 급작스레 본가로 내려온 저를 태우러 오셨던 아버지와 차에서 제게 건네었던 한마디입니다. 은퇴 후 지방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정원생활을 하고 계신 아버지는 저의 서울 생활을 늘 궁금해하십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내려온 저를 마중 나온 날이면 그간 있었던 일이나 어떤 프로젝트를 하는지, 회사생활은 어떤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제 직장 생활과 함께 생겨난 루틴이죠.
저도 숨니처럼 누군가가 어떤 회사냐고 묻는 질문에 늘 첫 번째로 “광고하는 회사야”라고 말을 합니다. 저에게 특별한 회사인 것은 분명하지만 무엇이 특별한 지, 저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깊게 생각해 보진 않았던 거 같아요. 회사라는 것은 결국 현대인에게 관성적이고 당연한 존재이니까요. 하지만 짧으면 1개월 길면 3개월에 한 번씩 만나는 아버지의 눈에는 제가 점점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거처럼 보이셨나 봐요. 그리고 저를 건강한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곳이 바로 회사라고 생각하셨고요. 이번 주말에는 숨니의 질문을 받고 지난 2년을 되돌아보고 기록들을 찾아보며 그간의 회사생활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서울이라는 드넓은 바닷속 나만의 섬
저는 초, 중, 고등학교를 비롯해 대학교까지 모두 경상권에서 보내며 매주 주말이면 본가로 돌아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했고, 평범한 일상이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취업을 이유로 아무 연고도 없이 도착한 서울은 그야말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처럼 보이더라고요. 섬이 가득한 남해안 바다 말고 섬이라곤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같은 그런 바다 있잖아요.
그래서 저의 인턴생활의 시작은 불안함의 연속이었던 거 같아요. 낯선 공간에서 업무를 보고 낯선 사람들과 유대를 만들어가고, 또 퇴근 후 낯선 방에 누워 저녁을 보내는 일상은 제겐 너무 힘든 시간으로 기억되어 있고요. 그러다 어느 날 문뜩 정신을 차려보니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껏 “아 내가 적응을 참 잘했는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근데 이번 주말, 아버지의 한마디와 숨니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 이것저것 찾아보다 인턴 3개월 차에 썼던 글 하나를 발견했어요.
그 글에는 저의 기억과 전혀 다른 감정의 기록이 담겨있었어요. 저는 지금껏 인턴시절 저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원인이 회사에 있다고 생각해 왔어요. 하지만 낯선 회사, 그리고 회사에서 만나는 낯선이 들은 오히려 서울이라는 드넓은 바다에서 저를 지켜주고 또 쉬어 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였더라고요.
조금이라도 표정이 좋지 않은 날이면 걱정 가득한 선배들의 쪽지가 책상에 늘 놓여 있었고, 제 졸업식은 어떻게 아셨는지 꽃을 한 아름 안겨주시기도 했었죠. 뿐만 아니라 가본 적 없는 여행지로 여행을 떠나신 선배가 돌아오시는 날이면 그 여행지의 신비로움을 가득 담은 선물을 건네주시기도 했어요.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회사는 회사야” “회사는 돈 벌기 위해 가는 곳이야”라고 말이죠. 하지만 저에게 이곳,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동료들은 먹고살기 위한 수단, 그리고 직장동료보다 망망대해 같은 서울에서 온전히 마음을 놓고 쉬고, 또 웃고 떠들 수 있는 안식처의 의미가 큽니다. 숨니의 질문에 잠깐 멈춰 지난 2년을 돌이켜보니 비로소 회사와 저 사이의 깊은 서사가 쌓였음을 깨닫고 어느새 서울이라는 깊고 넓은 바다에서 서핑도 하고 수영도 하는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조금 뭉클하네요..)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이 되는 곳
숨니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업에 대해 꽤나 깊게 고민해 보고 또 질문을 할 수 있었는데요, 저의 이른 결론은 저희는 '직업인'이라는 것이에요. 저는 퇴근길에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누님과 통화하는 것을 즐겨하는 편입니다. 항상 업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에서 얻은 무언가를 실천하는 누님의 모습에 동기부여받기도 하죠.
저희 누나는 제조업 계열의 기업에 방문해 안전 상태를 진단하고 미흡한 부분이 발견되면 수정권고 및 개선방향을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정 제조업에 국한된 진단을 하는 것이 아닌 '제조업'으로 통칭되는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는 펄펄 끓는 용광로가 있는 회사에 출장을 가기도 하고, 다른 날은 최첨단 장비가 가득한 반도체 회사에 출장을 가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누님의 업에서는 각 구성원들이 겪고 느낀 풍부한 '경험'을 나누고 얻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하더라고요. 대한민국의 모든 기업을 혼자 다 갈 수 없으니 선후배 각자가 겪은 경험을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산인 것이죠.
하지만 경직된 회사 분위기 탓에 비슷한 연차의 팀원들을 제외하곤 일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각자가 크게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죠. 저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왜? 노는 것도 아니고 업에 도움이 되는 행동인데?”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누님의 답변이 이어졌습니다. “일단 그러한 경험을 그들의 자산이자 경쟁력이라 공유를 강요할 수 없어. 그리고 그들은 페이에 합당한 노동력을 제공하기에 직장인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고” ”근데 나는 이 일을 더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고 싶은 '직업인'일뿐이야. 누가 틀리고 맞고는 없어”라고 말이죠.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늘 생각과 배움을 공유하는 문화가 일상인 저희 회사가 떠올랐어요.
업무에서 겪었던 시행착오, 혼자만 알기 아까운 기술, 그 밖에 업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한 곳이죠. 그러나 누님의 답변처럼 개인의 경험이 자산이자 경쟁력인 시대에서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배움이나, 노하우를 나누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저희 구성원들이 생각과 배움을 공유하고, 서로의 발전을 응원하고 돕는 이유는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으로 업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광고라는 일로 모인 우리가 더 좋은 방향으로 함께 가면 좋겠고,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누군가는 겪지 않았으면 싶고, 내가 접해본 기술이 누군가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않을까 하는 건강한 마음을 저마다 품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맹모삼천지교라 했던가요. 이런 환경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저도 어느새 직장인보다 직업인으로 업을 대하고 있는 거 같아요.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던 저는 생각과 고민을 나누는 것이 익숙해졌고, 어설프지만 작은 배움이라도 나누고 싶은 마음에 뉴스레터를 써 공유하거나, 업무 간의 시행착오를 세션의 형태로 나누기도 했죠.
숨니, 저 건강한 회사에서 꽤나 건강한 삶을 살고 있지 않나요? (뿌듯) 아마 아버지도 지난 대화에서 그것을 느끼신 거 같고요. 누군가가 어떤 업을 하냐고 묻는다면 '광고'라고 답하겠지만 어떤 회사에 다니냐고 묻는다면 이제 지체 없이 “건강한 회사에 다녀”라고 말할 거 같아요. 이것이 저의 회사 생활의 서사를 요약한 한마디입니다.
숨니가 매버릭에게
제주 펀미팅은 즐거웠나요?
저는 제주가 고향이라 펀미팅 장소가 제주인게 반갑지 않은.. 구성원입니다 ^^;
(*회사에서는 1-2년에 한 번 전사 워크샵을 가는데 '펀미팅'이라는 이름답게 재밌게 놀다 오는 날이다)
제주 여행에 큰 기대가 없는 사람인데, 이번 동료들과 함께 간 제주에서는 특별한 경험을 많이 했어요. 제주 여행은 맛집, 카페 여행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제주 문화가 스며든 곳을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제주도 사투리”였습니다. 평소 부모님과, 친구들과 전화할 때 흔히 썼던 말인데 표준어로 해석해 보니 왜 이리 새로운지요. 제주도 사람들의 츤데레 면모가 언어에서도 그게 고스란히 담겨있지 뭐예요.
욕심 내지 말앙 숨 이실 때 돌아오라이!
구좌읍에 있는 <해녀의 부엌>에서 만난 사투리입니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러 가면 선배 해녀가, 후배 해녀에게 당부하는 말인데, 욕심 내지 말고 숨이 남아 있을 때 육지로 올라 오라는 말입니다. 속 뜻은 안부를 비는 인사지요.
조들지 맙서양
곶자왈 숲을 걷다 나무 팻말에 쓰여있던 말입니다. 겉 의미는 재촉하지 말라는 의미인데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표현에 서툰 섬사람들이 퉁명스럽게 걱정과 안심을 시켜주는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뭉클하더라고요.
SNS에서 ‘회사어’를 번역해 주는 짤들을 본 적 있나요? ‘넵’ 한마디도 다양한 상황에서 느낌표, 물결 유무에 따라 의미를 달리 해석하기도 하죠. 어떻게 보면 ‘언어’는 그 커뮤니티의 문화를 잘 설명해 주는 요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매버릭이 느낀 저희 회사만의 문화가 담긴 말이 있을까요? 처음 이직 했을 때 어떤 '말'에 놀랐던 경험이 있거나, 혹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쓴다고 생각했던 말이 있을까요? 다른 회사와 다른 우리 회사 만의 언어를 알려주세요!
매버릭의 답장
저는 제품디자이너로써 첫 커리어를 시작했고 디자이너라는 나름의 자부심과 높은 안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에이전시에서 일하면서 여러 대기업들의 선행 프로젝트를 단독으로 맡았던 적도 있고, 하루에 2시간 3시간 쪼개어 자면서 프로젝트 마감을 치는 것에 몸이 익숙해졌고, 1시간 넘는 출퇴근 시간에 프로그램 인강과 디자인 서적을 쪼개어 보면서 단기간에 정말 많은 노력으로 몸을 밀어붙였던 것 같아요. 그 기간에 제 건강도 조금씩 무너졌고, 여러 안 좋은 개인적 사정들도 겹쳤었어요. 그럼에도 제가 디자인한 것이 세상에 나와 누군가가 사용하며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희망에 열정을 가졌었던 것 같아요. 단기간에 선임디자이너로 후배들을 가르칠 수도 있었고, 짧은 경력에도 1년에 수십 개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담당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주변의 동료를 둘러보니 그 누구도 제품디자인을 왜 하고 있는지, 자기가 만든 디자인에 어떤 가치와 어떤 생각들을 담고 있는지, 심지어 회사의 대표님 조차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컴퓨터를 보며 생각 없이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에 그쳐 있었고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고 남들과 다른 듯하게 행동하는 모습들에 엄청난 분노와 회의감에 휩싸였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들이 디자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사람들이 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나와 사람들이 관심가지는 것,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 그것들의 집합체가 결국 디자인이라고 느꼈어요. 제품디자이너의 선망의 대상은 누구나 알다시피 '스티브 잡스'입니다. 제가 스티브 잡스 명언 중에 대학교 학생 때부터 정말 좋아했던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It's really hard to design products by focus groups. A lot of times, people don't know what they want until you show it to them." (포커스 그룹들에 의해 제품을 설계하는 것은 매우 어러운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제품을 보여주기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저는 디자이너란 무엇인가를 디자인하기 전에 우선 사람들을 관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려면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 있는지, 무엇을 사랑하는지 우선 알아야 합니다. 문화를 알아야 하고, 역사를 알아야 하고, 언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디자인은 예쁜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국 심도 있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사람들에게 시선을 더욱 정교하고 끈기 있게 붙이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요. 그래야 시장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선의 접점에 서게 되면 내가 결국 시장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겠구나!, 비주류를 주류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요. 바보 같고 우둔해 보이는 것을 트렌디함으로 전환시키는 힘을요.
제가 이 회사에 입사하면서 대표님과 미팅을 하며 제 커리어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왜 제품디자이너가 갑자기 광고회사에 입사를 했는지 물어보시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디자인 회사를 가서 커리어를 쌓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가장 가깝게 닿아있는 매체 속에 일하는 광고회사를 경험해 봐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소비자들의 피드백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최접점에 서있다고 생각했어요. 회사에 처음 입사하고 느꼈던 가장 강력한 강점, 그리고 경험은 바로 이 회사가 끊임없이 사람들의 문화 속에 공존하려 노력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공감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에요. 적어도 제가 협업했던 모든 팀들에서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팀장 혹은 팀원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광고인의 커리어의 입장에서 때로는 고리타분한 지점들이 보일지 모르겠지만, 다른 업에 종사하다가 들어온 저의 눈에는 정말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에이전시라는 한 회사가 100명이 넘는 인원을 데리고 운영하다 보면 조직이 딱딱하게 고착되는 지점들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저희 회사는 주기적으로 흔들어주는 밀크셰이크처럼 유동성이 매우 돋보이는 기업이었어요. 그런 것들을 장려하는 문화들도 매우 많고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이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더 그 과도기에 들어선 것 같아요. 저희 회사의 색깔은 정말 다양한 것 같습니다. 마치 출발선상에 스탠바이하고 있는 육상선수 같은 느낌이랄까요?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틀어도 시장의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그 책임을 지고 고군분투하는 훌륭한 리더들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퇴사자들이 많을 수도, 주변에 바뀌는 인원들이 많아 동요되는 지점들도 있겠지만, 이런 것들은 현재 세상이 변화하는 한 흐름 속에 있다 생각해요. 언어를 질문해 주셨지만 동문서답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저는 굳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이 유기적 흐름을 잃지 않는 멋진 문화와 사람들이 저희 회사만의 고유한 언어인 것 같습니다.
PS: 아! 슬랙에서 첫인사로 "팀~! 안녕하세요" 이거 약간 ㅋㅋ 저희 회사 언어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