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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눈보 May 07. 2023

애써 외면했던 순간들에 대해

[서평] 애쓰지 않아도 <최은영>

'애쓰지 않아도'는 최은영 작가의 일곱 개 단편 소설을 엮어 낸 책이다. 최은영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이 소설은 읽을수록 곱씹게 되고, 곱씹을수록 글에서 달고 고소한 향기가 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분명 허구일 테지만, 활자를 타고 완성되는 인물들의 실루엣과 계절감, 온도, 표정들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일곱 가지 이야기 중에 유독 나를 울렸던 '데비챙' 편을 생각하면 아직도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울대가 시큰거린다. 남희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을 여행하다 우연히 데비라는 소년을 만나 친구가 된다.

데비는 자기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뤄낼 수 있다는 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데비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사람은 자기보다 조금 더 가진 사람을 질투하지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진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데비를 질투할 수조차 없었다.


살다 보면 꿈과 사랑과 같은 희망찬 단어들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먼 존재처럼 느껴진다. 제대로 몸을 부딪혀 아파보지도 못했으면서, 두려워 가슴 한켠에 묻어두기 쉬운 것들. 꿈과 사랑을 향해 성실하게 온 힘을 쏟는 사람들은 빛이 난다. 데비챙은 그런 사람이었다.

데비챙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다 배우자의 죽음을 겪게 되고, 장례를 치른 후 남희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한다.


남희,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운이 좋았지. 그녀와 만나고 사랑할 수 있었잖아. 그게 어떤 건지 태어나서 경험할 수 있었잖아. 어릴 때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 하지만 이제 그 이유를 알지. 이런 사랑을 경험해 보려고 태어났구나. 그걸 알게 됐으니 괜찮아.


감당하기 힘든 큰 불운 앞에서는 아무리 좋았던 추억도 부정하기 쉽다.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확실하게 뒷받침해 줄 근거로 사용하기 충분하니까. 더 처절하게 스스로를 가엾게 만들어 자기 연민에 빠지는 편이 더 쉬운 쪽이니까. 하지만 데비는 사랑하는 배우자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기보단, 사랑했던 시간들에 대한 존중을 통해 진정한 고마움을 느낀다.

 

짧은 이야기지만 여운이 긴 질문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나도 데비처럼 살 수 있을까?'

사랑과 꿈같은 걸 성실하게 찾고,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부딪혀 보는 귀한 태도를 잃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괜스레 남아있는 용기에 무게추를 달아본다.


일곱 개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간결한 문장들은 오히려 꾸밈이 없기에 더욱 와닿는다. 작가의 시선은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모서리나 구석을 감싼다. 소수의 이야기를 포함한 다수의 이야기.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결국 평범한 너와 나의 이야기. 특별한 게 모이면 결국 평범함이 된다는 어느 노래 가사와 절묘히 맞닿아 있는 이야기들의 집합소. 단순히 읽는다는 것 자체로 위안을 얻었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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