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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재 Jun 03. 2020

고모의 마음

포기는 쉬울지언정, 그 한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아흔 한 살이 되었던 그 해 가을부터, 할머니는 약 5개월 동안 둘째 딸인 고모네 집에서 살았다.


평생을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살던 할머니는 아파트에서 잠시 살게 되었다. 당시 할머니는 치매 진단을 받았지만, 밥 먹은 것을 잊어버린다거나 냉장고에 넣은 걸 깜박한다거나 하는 일상적인 수준에서의 불편함만 있었다. 사람이나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시진 않았다. 심지어 그해에는 밭에 고구마까지 심어놓으셨다. 나는 집에 올 때 할머니를 가끔 뵈어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생활공간이 바뀌고, 하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서였을까?

안 그래도 낯선 동네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혼자 바깥에 나가지 못했다. 원래 집이야 시골의 항상 아는 길, 아는 사람들만 지나 다녔으니 걱정은 덜했지만 도심 속 아파트는 치매 걸린 노인을 잃어버리기 딱 좋았다. 그렇게 할머니는 집안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고, 점점 쇠약해지셨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기저귀를 차기 시작했다. 혼자 화장실을 가지 못하셨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베란다를 보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갑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 바닥과 벽을 쿵쿵 치기도 했다. 장성한 자녀와 없는 듯, 있는 듯 조용하게 살던 고모는 아래층과 옆집의 민원을 처음으로 받았다. 할머니는 딸인 고모가 편했고, 고모도 할머니가 편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막말을 하며 싸우는 날이 잦아졌고, 할머니가 고모를 마구 때린 적도 있다고 한다. 고모의 팔에 할머니가 한 것으로 보이는 손톱자국과 멍이 있었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고모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언제 집이 완공되어서 할머니를 데려갈 수 있는지 자주 물었다. 그리고 볼 때마다 죽는 소리를 하셨다. 할머니를 보는 게 얼마나 힘든지, 빨리 할머니 좀 데려가라고 말이다. 집의 완공 일자가 예정보다 늦어지자 고모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내 엄마 아빠가 임시로 살고 있는 원룸에라도 데려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난 그런 고모가 서운했다. 고모가 힘든 부분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고모 또한 할머니의 자식이다. 심지어 아빠와 엄마는 30년 넘게 할머니를 모시며 살았다. 사실 할머니가 집에 온다면 고모가 하던 일은 엄마에게 넘어올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엄마는 며느리이고 고모는 할머니의 자식인데 어쩜 그럴 수가 있는 걸까. 평생 같이 살라는 것도 아니고 집이 지어질 때까지 몇 개월만 살면 다시는 함께 사는 일이 없을 텐데. 아픈 엄마한테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 사람으로, 여성으로서 고모를 이해하기도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고모들을 사랑했으면서도 아들인 내 아빠와 참 지독하게 차별했다. 모든 전후 사정을 다 알지 못하는 내가 봐도 그랬다. ‘옛날에는 다 그랬다’라며 위로하기에는 고모들은 당사자였다.


“니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들만 엄청 좋아하잖아.”

“니 아빠 이름은 멀쩡한데 내 이름은 순례다? 나는 평생을 이름 때문에 놀림 받고 마음에 한이 맺는데.. 왜 그렇게 대충 지어줬는지 모르겠어. 참 우리 엄마도 아들만 엄청 좋아했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주인공 덕선이가 울면서 “왜 언니는 보라고 동생은 노을이인데 나는 덕선이야!”라고 하는 걸 듣는데 기시감이 들었다.


고모들은 종종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했던 차별을 말했다. 아빠의 동생인 막내 고모는 아빠 때문에 가고 싶은 대학도 못갔다. 공부에 흥미도 없었고 잘 못했던 아빠는 고등학교만 졸업했지만 할아버지는 아빠가 꼭 대학을 갔으면 하셨다.

그래서 기부입학을 해서라도 동네에 있는 대학이라도 갔으면 했다고 한다. 지금은 상상도 하기 어렵고 당시에도 부끄러운 일이었겠지만 그만큼 할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욕심을 부리셨다. 할아버지가 많이 배우지 못했던 한을 풀고자 하셨다. 그러나 아빠는 할아버지의 욕심에 따라주지 않았다. 그리고 2년 뒤 막내 고모가 대학에 합격했지만, ‘아들도 가지 않은 대학을 왜 여자가 가냐’라는 이유로 등록금을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며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기만 하던 고모는 결국 공장에 취업했다.


만약 지금 내 부모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나는 극단적으로 연을 끊을 각오를 해서라도 싸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변화한 세상에서 자란 내 생각이고, 만약 아주 어릴 때부터 숨 쉬듯 욕망을 꺾였다면 고모들처럼 쉽게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고모들은 포기했지만 그 한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고모를 이해하기 힘들면서도 이해가 되었다.


드디어 입주 당일이 되었다. 하루 종일 짐 정리를 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되었는데도 왜 이렇게 정리가 안 되는지 모두 매우 지친 상태였다. 그런데 아빠는 할머니를 모셔오자고 했다. 할머니를 부축해야 하는 상황일 수 있으니 동생과 나를 데려가려 했다. 피곤하기도 하고, 정리가 덜 되어 정신없는 집에 할머니가 와도 간신히 누울 자리만 있는 상태이기에 다음날 할머니를 모셔오자고 했지만 아빠는 서둘렀다.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밤 9시가 되어 고모네 집으로 향했다.


전날 밤새 주무시지 않고 베란다에서 소리를 지르던 할머니는 꼬박 밤을 새고, 낮에 수면제를 먹고 겨우 잠드신 상태였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시는 할머니를 동생이 둘러 업고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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