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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재 Apr 14. 2019

할머니가 후회하는 단 한가지

"아쉽지, 원통해. 근데 그땐 다 그랬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더이상 생에 미련이 없는 날에 나의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무엇을 후회할까. 나이가 들수록 해보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만 후회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격언이 있다. 내 인생의 작은 단위의 사건들을 되돌아보면 역시 해보고 못했을 때의 후회보단, 도전조차 해보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그러니까, 할까 말까 할 때는 일단 해라. 도전정신을 북돋아 주는 말들이 지금 나에겐 유효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선택권이 없었다. 당신은 선택할 수가 없었다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며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친다. 가끔은 멍이 들 정도로. 92살이 된 지금까지도 할머니 마음 속엔 커다란 미련이 자리잡고 있다.


할머니는 학교를 못갔다. 글을 배우지 못했다. 치매에 걸려 모든 기억을 잊어가는 할머니는 매일 그 말을 하신다. 할머니는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한 가지가 글을 배우지 못한 거라고 했다.



- 나는 국민학교도 못가고 글도 못배웠어. 그때는 정말 왜 그랬는지 몰라! 근데 그땐 그냥 그런걸 몰랐어. 나만 안간게 아니고 내 또래는 다 안갔어. 오네, 육네, 숙희네.. 지금 이름 기억하는 내 친구들 다 안갔어. 그때는 어려워서 그랬었나? 왜 나 학교 안보내줬는지 모르겠다?



할머니는 학교를 못간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얼굴의 주름이 더 깊어지는데, 그 표정들이 항상 비슷하다. 우는 것도 화가 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후회의 표정이다.


- 생각해보면 돈이 없어서 못간 것도 아니여. 우리 아버지가 황소로 마차를 끌었는데 돈을 잘벌었던 것 같어. 그때 동네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다녔어. 근데 왜 학교를 안보내줬는지 모르겠다. 왜그랬대? 우째 그랬을까 그때는.



할머니는 5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여동생과 남동생이 둘씩 있었는데, 남동생 둘만 학교를 갔다고 했다.


- 할머니, 그럼 학교 안가고 뭐했어?

- 놀았지 뭐. 고무줄 놀이 하고, 사방치기하고.

- 할머니 글 못배워서 너무 아쉽지.

- 아쉽지, 원통해 죽겠어. 근데 그때는 다 그랬다. 나만 못배운게 아니고 우리동네 내 또래 다 못갔어. 나만 못갔으면 그건 또 그런데 다 못갔어. 그때는 학교도 없었나? 아니면 어려워서 그랬었나 이젠 잘 기억도 안나. 우리 아버지는 수레로 다리미돌 같은걸 옮겨서 장에 내다 팔았어. 너 다리미돌 아니? 그런거 내다 팔았다. 그땐.. 나만 못간게 아니야. 내 또래들은 다 못갔지?


말이 별로 없는 할머니는 글 이야기만 나오면 말이 많아진다. 했던 말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리고는 당신께서만 글을 배우지 못한게 아니고 다 못배웠을거라며 나한테 꼭 확인을 받는다. 배우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였으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으니까 괜찮다. 할머니의 잘못이 아니라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것에 위로를 받고 싶어하시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 시절엔 어려우니까, 여자니까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 뒤에는 결혼하고 아이 낳고, 먹고 사는게 바빠서 또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미련은 여전히 할머니 마음 속 깊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글 배우고 싶다고, 노인들한테 가르쳐주는 곳이 있다며 가고싶다고 했다. 그때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타박을 주며 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어느날 할머니가 보고 있는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글을 배워 책을 만드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들이 나왔다.


- 할머니, 할머니도 학교갈래? 요새는 할머니처럼 젊을 때 한글 못배운 사람들한테 한글 가르쳐주는 학교가 있어. 할머니도 갈래?

- 요새는 또 그러니?

- 응 할머니. 지금 저기 텔레비전에 나오는 할머니들도 한글 배워서 글쓰잖아.

- 저 사람들은 다들 몇살이야?

- 할머니랑 비슷하지 않을까? 할머니도 가자


사실은 할머니보다는 젊은 분들이었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설렘이 조금씩 퍼졌다. 그러나 할머니의 설렘은 금새 사라졌다.


- 됐다. 있던 것도 다 깜빡하는데 뭘 배워. 이제 못배워.


할머니가 매일 같은 글자를 배우더라도, 배우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단호했다. 결국 나는, 우리 가족들은 할머니의 응어리를 풀어드리지 못했다.


지금 나의 후회는 내가 더 어리고 할머니가 더 건강하실 때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못한 것이다. 나는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의 시간을 살아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이미 할머니는 모든 것을 잊어가고 있었다. 조금 더 건강하실 때 이런 이야기를 나눠볼걸, 할아버지한테 글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을 때 나는 왜 몰랐을까. 지금이라도 덜 후회하기 위해 매주 할머니를 보러 가고, 부모님을 보러간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고 기록한다. 지금이라도 돌아보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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