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의 '당연한 노동'의 폭력성
이 말은 단순히 비유인줄만 알았다. 젊을 땐 ‘벽에 똥 칠 할 때까지 살고싶지 않다.’고 하고, 나이 든 노인들은 ‘벽에 똥 칠하기 전에 죽어야지.’라고 하신다. 단순히 늙음을 단적으로 비유하는 말인 줄 알았으나, 이를 실제로 내 눈앞에서 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느날은 아침에 일어나니 할머니가 화장실 앞에 계셨다.
- 할머니! 여기서 뭐해?
- 목간통 가려고 나왔지.
할머니 방으로부터 화장실까지 이어지는 바닥에 무언가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곧 코를 찌르는 냄새에 그 예감이 틀리지 않음을 알았다. 할머니는 항상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있는데, 모르는 새에 용변을 보면 항상 손으로 만졌다. 물컹한게 무엇인지 궁금해서 만진건지, 설마하는 불안감에 만진건지는 모른다. 우리에게 미안하신지 아무 말씀도 안하고 그대로 화장실로 가신다. 옷과 손에 묻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집 안의 물건을 잡고 지탱하며 말이다.
그 뒷처리를 하는 것은 꽤나 피곤하다. 집 안의 모든 커튼을 치고 문을 단단히 잠근 후 씻겨드리기 시작한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를 씻기고, 옷을 입혀 드린다.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발라드린 후 할머니를 깨끗한 방에 들어가 계시도록 한다. 그 후에 본격적인 청소가 시작된다. 집 안의 창문을 연다. 그리고 식초와 물을 섞어 걸레질을 한다. 모든 냄새가 사리지고 흔적이 없어질 때까지 청소는 반복한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할머니의 행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할머니 생애 처음으로 농사를 짓지 않는 첫 해였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는 할머니는 그것 조차 잊어가고 계셨다. 그래서인지 틈만 나면 아무것도 심지 않은 밭에 가서 잡초와 풀을 뽑으며 다음 농사를 기약하신다.
30도가 넘는 땡볕에서 무의미한 풀뽑기를 하고 있는 할머니를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모시고 들어오면 그때부터 다시 일이 시작 된다. 아빠가 1달 전에 사온 새 지팡이는 항상 잊어버리고 밭의 중간에 두고오신다. 지팡이를 찾아 온 후 흙이 잔뜩 묻은 손과 옷이 벽에 닿지 않게 온 힘을 다해 할머니를 부축한다. 그리고 할머니를 씻겨드린다. 깨끗한 방으로 할머니를 모신 후 다시 청소를 한다. 현관부터 화장실까지 이어진 모래를 청소기로 빨아들이고 걸레질을 한다.
이렇게 하루동안 두 번 이상 할머니를 씻기면 난 모든 기력이 사라져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이런 나를 보고 동네사람들과 가족들은 효녀라고 부른다. 난 그 말이 싫다.
저 말은 얼핏 보면 칭찬이지만, 계속해서 할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한다. 특히 남이 아닌 가족의 칭찬이 그렇다. 효녀라고 칭찬하지 말고 돌봄을 나눠야 한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은 절대 오래가지 못한다. 사실 이것이 내가 효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을 더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일방적인 희생이 누군가에겐 당연시 된다. 현재 이런 할머니를 케어하고 돌보는 일은 오로지 나와 엄마의 몫이다. 이 일들은 누군가는 해야하지만 그 누가 해도 당연한 일은 아니다. 특히, 엄마가 그렇다.
- 할머니 여기가 어디에요?
언젠가 할머니와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할머니에게 이름이 뭔지, 나이가 몇 살인지, 여기가 어딘지, 본인은 누군지 물었다. 장기요양등급 판정을 위해 심사를 하러 온 담당자 분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에게 이름을 묻고 여기가 어딘지 늘 물었다. 그 뒤로 나와 가족은 그 질문을 할머니를 진단하기 위해 사용했다. 실제로도 할머니의 대답은 늘 달라졌다.
- 할머니, 지금 여기 어디게?
- 마을회관이지! 어디긴 어디야. 그건 왜 물어?
할머니는 작년에 30여년간 살던 낡은 집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왔다. 할머니는 이사 온 집을 마을 회관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인지 종종 밤마다 외출할 채비를 하신 후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셨다. 작은 지팡이에 90도로 꺾인 몸을 간신히 지탱하면서 저녁준비를 하러 가야한다고 양말을 챙겨 신고 신발을 찾았다. 어떤 날은 저녁 7시에, 어떤 날은 새벽 3시에 그러셨다. 난 아빠를 닮아 잠귀가 어두웠다. 결국 피곤한 몸을 일으키는 것은 늘 엄마였다. 엄마는 그렇게 고단한 새벽을 마치고 아침을 맞이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이렇게 나보다도 할머니를 더 극진히 돌보는 것은 엄마였다.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평생 남편의 어머니와 한 집에서 살아온 나의 엄마는 30년간 집안의 모든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책임졌다. 쉰이 한참 넘은 며느리의 역할에 시모의 돌봄노동이 추가 되었을 때도 당연했다. 이렇게 오랜시간 저평가 되어왔던 모든 노동이 아이러니하게도 핏줄인 나에게 왔을 때 가치를 인정 받는다.
난 아버지의 자식이고 할머니의 아들의 딸이다. 할머니는 평생 한 집에 함께 살아오며 묵묵히 나를 돌봐주셨다. 신생아 때부터 유년기, 청소년기까지 내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사랑을 주셨던 집안의 어른이었다. 치매 걸린 할머니가 딸의 자식들의 이름은 몰라도, 아들의 자식의 이름은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를 돌보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어쩌면 돌봐드릴 수 있음에, 사랑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는 나와 다르다. 할머니와 혈연도 아니며 보살핌을 받은 적이 없다. 그저 할머니의 아들과 결혼했을 뿐이다. 남편의 고향으로 와 평생 가사노동을 도맡아 하며 남편의 부모를 돌본 엄마의 노고는 아무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모든 일은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방기한다면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할머니는 그저 며느리의 노동을 착취하는 가해자이기만 할까?
할머니는 얼굴도 모르는 이와 결혼을 함과 동시에 평생을 자라온 고향을 떠났다. 남편의 고향으로 와서 7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 집안의 모든 가사노동을 도맡았다. 남편의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들까지 돌보았다. 할머니 역시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 ‘당연한 노동'의 폭력성을 감내해야 했다. 이 노동의 대물림 속에서 나의 할머니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10년전 엄마의 엄마, 즉 나의 외할머니는 암판정을 받았다. 할머니가 병원에 있을 때 수술 전 잠시 간병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다. 물론 정확히는 엄마와 이모, 외숙모들이 그 대상이였다. 그러나 엄마의 오빠는 사정이 있어 참여하지 못한다고 했다. 엄마는 나에게 속상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 아픈데, 다들 돌아가면서 하는데 맏며느리가 빠지면 되니? 넌 어떻게 생각해? 나는 좀 그래. 다들 하는데 어떻게 안해.... 뻔히 그때 할 사람 없는거 알면서.
아픈 시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숙모를 보며 비난하는 내 엄마를 과연 욕할 수 있을까?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고 다시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든다.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이 서로를 향하지만, 그 비난의 가운데에는 전통적인 ‘가족'을 이루는 중심, 즉 할아버지, 아빠, 삼촌들은 없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고 다시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든다.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이 서로를 향하지만 그 비난의 가운데에 전통적인 '가족'을 이루는 중심, 즉 할아버지, 아빠, 삼촌 들은 없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방관자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성씨를 가진 여자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탓하고 가엾어하다 생을 마감한다. 세대가 바뀌어 내 또래 여자들이 세대의 허리에 자리 잡으면 그 원망의 사슬이 끊어질까, 며느리에게 아무것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 올까.
종종 할머니를 돌보는 나를 보며 동네 어른들은 말한다. 시집갈 준비가 되었다고. 할머니를 돌본 이력이 있는 난 누군가의 어머니를 돌볼 준비가 된 경력직 예비 며느리인 셈이다.
내 돌봄은 온전히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기억하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다. 나에게도 때때로 힘들고 벅찬 순간이 온다. 그러나 할머니를 돌봐드릴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힘들지만 최선을 다한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앞선 세대 여자들이 아무 대가 없이 칭찬 없이 오랜세월 해온 일이다.